1976-1980 역사


1976년 애플의 역사 입니다.

1월
스티브 워즈니악은 휴렛 팩커드(Hewlett Packard)사에, 스티브 잡스는 아타리(Atari)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워즈니악은 26세, 잡스는 21세로 이들은 잡스의 차고를 작업실로 고쳐 새로운 개념의 개인용 컴퓨터를 만드는 데 몰두 하였다.


3월
워즈니악과 잡스는 6개월 동안 컴퓨터 회로도에 대한 설계 및 디자인 작업을 마치고 40여 시간에 걸쳐 개인용 컴퓨터 프로토타입을 완성시킬 수 있었는데 이를 ‘Apple I’이라고 명명하였다. 모터롤라 6502 프로세서를 내장한 세계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인 Apple I 은 키보드와 케이스가 없는 보드 상태였으며 사운드 혹은 그래픽을 지원하지도 못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었는데도 동네의 전자 제품 가게에 보여 주자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가게 주인은 키보드와 케이스도 없이 007가방과 같은 가방에 조립된 제품을 보고, 케이스로 조립해 오면 대량으로 구입하겠다는 반응을 보여 워즈니악과 잡스는 자신을 얻게 되었다.



4월
두사람은 Apple I을 워즈니악이 몸담고 있는 휴렛 팩커드 사에 보여 주고 생산을 의뢰했으나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워즈니악과 잡스는 700달러도 채 안되는 돈으로 만우절인 4월 1일 애플 컴퓨터를 설립하고 Apple I을 캘리포니아의 팔로 알토에 있는 홈브류(Homebrew) 컴퓨터 클럽에 최초로 선보였다.



5월
잡스는 그의 VW 밴 자동차를, 워즈니악은 휴렛 팩커드 프로그래밍 계산기를 팔아 자본금을 1,350달러로 늘렸는데, 그 후 바이트 컴퓨터 상가에서 50개의 Apple I 보드를 주문하는 데 힘입어 잡스는 자신의 집 차고에서 본격적인 생산을 시작하였다.



6월
레지스 맥케나(Regis McKenna) 광고 회사에 애플 컴퓨터의 광고를 맡기자 이 개인용 컴퓨터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모아지기 시작하였다.



7월
광고에 힘입어 많은 추종자들에 의해 Apple I 보드를 바이트 컴퓨터 상가에서 50대 구입하여 진열하였다. 그러자 열렬한 컴퓨터 및 전자광들에게 666.66달러에 판매되기 시작하면서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판매고가 오르기 시작하였다.



8월
잡스는 아타리 사의 설립자인 놀란 버쉬넬을 통하여 돈 발렌타인이라는 모험 자본가를 만난다. 발렌타인과의 만남은 애플 사가 성장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발렌타인은 인텔사와 페어차일드 반도체 회사의 마케팅을 담당한 바 있는 마이크 마큘라라는 투자가를 소개하여 그를 애플 사의 회장으로 영입하였다.



11월
마큘라를 영입함으로써 회사의 체계가 잡히게 되자 향후 10년간 5억 달러의 매출 목표를 내세우며 애플 사 최초의 정식적인 사업 계획이 발표되었다. (이 계획은 5년 만에 이루어졌다.)



12월
Apple I 컴퓨터의 판매망이 미국 내에서 10개 상점으로 확산되었다.


1977년 애플의 역사 입니다.

1월
애플 컴퓨터는 잡스와 워즈니악 그리고 새로운 동반자이자 의장인 마이크 마큘라에 의해 본격적으로 정립되었고 마케팅 전략에 의하여 마큘라의 25만 달러와 여러 자본가들에 의한 투자가 단행되었다. 애플 사는 장소를 캘리포니아 쿠퍼티노의 스티븐스 크릭 보울바드라는 곳의 빌딩으로 옮겨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2월
마큘라는 마이클 스코트(Michael Scott)라는 인재를 회사의 대표로 영입하였는데, 이후 스코트는 애플 사 발전의 중추적인 힘이 되었다.


4월
컬러 그래픽의 사용이 가능하고 키보드, 파워 서플라이 및 깔끔한 디자인의 케이스를 지닌 본격적인 개인용 컴퓨터인 Apple II가 선보인다. Apple II로 그 해 컴퓨터쇼에 참가한 애플 사는 큰 규모의 부스에 전시를 위한 대형 프로젝트를 설치하고 Apple II의 홍보에 열중하였다. 현재까지 많은 매킨토시 사용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알록달록한 애플 사의 로고는 레지스 맥케나 광고사의 롭쟈노프가 디자인한 것으로, 이때부터 탄생하며 상품에 부착되어 판매되기 시작하였다.


5월
레지스 맥케나 사에 의해 애플 사의 광고가 최초로 게재되기 시작하였는데 전자에 관심이 많은 사용자를 대상으로 맞춘 것임에도 불구하고 애플 사는 소비자 잡지에 개인용 컴퓨터를 홍보하는 최초의 회사로 기록되었다.


6월
Apple II는 4KB의 기본 메모리와 두 개의 게임 패들, 그리고 데모 카세트를 장착하면서 1,298달러의 가격으로 환벽한 생산 라인과 테스트 라인을 갖추고 본격적으로 판매되기 시작하였다. Apple II는 사용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TV를 모니터로, 오디오 카세트레코더를 저장 장치로 사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Apple II는 그 당시에는 무척 혁신적인 제품으로써 대용량의 메모리와 내장 그래픽, 사운드 그리고 베이직 인터프리터를 탑재하였고,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디자인을 지닌 케이스에 담겨 판매되었다. 이 최초의 고해상도를 지원하는 개인용 컴퓨터의 전통은 추후 매킨토시로 이어졌으며, 그 외에 추가적으로 주변 장치를 추가할 수 있는 슬롯(Slot)을 지닌 개방 구조를 채택하여 뮤직 및 비디오 카드, CP/M 카드 등을 꽂아 사용하는 범용 컴퓨터의 표준을 제사하였다. 월간 주문량이 100만 달러에 육박할 만큼 성장가도를 달리던 애플 사는 유럽에 유러플(Eurapple)이라는 독립 회사를 설립하여 유럽 시장에 컴퓨터를 공급하기 시작하였다. 국내에서는 이로부터 3년 뒤인 1980년에 애플의 복제품이 청계천을 중심으로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중고생들 및 엔지니어를 중심으로 개인용 컴퓨터의 열기가 일어났다.

1978년 애플의 역사 입니다.

1월
애플 사는 쿠퍼티노의 밴들리 드라이브에 새로운 건물을 마련하고 장소를 옮겨, 1년 이상 이곳을 배경으로 성장하였다.


3월
애플 사는 대부분의 프린터와 연결이 가능한 다양한 인터페이스 카드를 발표하였다.



6월
가전 제품 전시회에서 애플 사는 저가격이면서 사용하기 쉽고 빠른 속도의 미니 플로피 디스크인 DISK 2를 발표하였다. 이 제품은 100KB가 넘는 자료를 저장시키는, 그 당시로는 대용량의 저장장치로 이전까지 카세트 녹음기 등의 장치를 사용하던 것에 비해 엄청난 생산성을 가져왔다. DISK 2덕분에 다양한 종류의 소프터웨어 개발이 촉진됨은 물론 애플 사가 급성장하는 데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이후 제때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주문이 쇄도하여 애플 사는 주식공개를 검토하기까지 이르렀다. 이 제품은 처음에 2명의 생산 인력으로 매일 30개씩 생산하기 시작했다. 서비스책의 일환으로 애플 사는 Apple Ⅱ 사용자를 위한 회사와 다우 존스 시장에 대한 전화 서비스를 개시하였다.



12월
2년 만에 애플 사는 미국 내에서 성장 속도가 가장 빠른 회사 중의 하나로 성장하였으며 판매는 10배로, 전국의 딜러는 300여 개 이상으로 늘어났다.


1979년 애플의 역사 입니다.

2월
마이크 스코트 대표를 중심으로 애플 사는 미국 전역에서 영업 개시 전략을 발표하고, “더 이상의 타자수는 필요없다.”(“No more typewriters.”)라는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이며 다양한 시스템 제어 모듈을 제공하면서 본격적인 세일에 나섰다.


6월
48KB의 기본 메모리와 시동 환경의 설정 및 화면 수정의 편리함을 위하여 베이직과 자동 부팅 룸을 지닌 1,195달러의 Apple Ⅱ+가발표되었다. 이 기종의 발표로 16, 32, 48 KB 등 메모리 확장 및 스크린 편집이 용이해졌는데, 시스템의판매와 병행하여 애플 교육 재단이 설립되어 교육용 소프트웨어나 애플 컴퓨터를 교육 과정에 접목시키려는 사용자를 대상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외에 주목할 만한 사항으로 애플 사 최초의 프린터인 Silentype이 소개되었고 당일 서비스를 원칙으로 전미국을 커버하는 정비 보수 서비스를 실시하였으며 최초의 딜러 회의가 개최되었다.



8월
Apple Ⅱ용 파스칼이 소개되어 애플 컴퓨터의 프로그래밍 환경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0월
개인용 컴퓨터 사용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Apple Ⅱ용 스프레드 쉬트프로그램인 비지 칼크(VisiCalc) 가 퍼스널 컴퓨터 사에 의해 발표되어 프로그래밍에 무지한 일반 사용자들에게 실제적인 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애플 컴퓨터의 위용이 점차 모양새를 갖춰 가면서 애플 컴퓨터의 열광적인 추종자들에 의해 전세계적인 유저 그룹인 애플 코어(Apple Core)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정되었다.



12월
애플 사는 애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포함한 전품목에 대해 저가의 1년간 보증제를 실시하였으며, 이후 Apple Ⅱ의 판매량은 1978년 대비 400% 이상 성장한 35,000대를 돌파하였다. 이에 따라 애플 사 외형은 괄목할 만큼 성장하여 네 개의 빌딩에서 250명의 인원이 근무하게 되었다.


1980년도 애플의 역사입니다.

3월
교육용 엔지니어링 툴인 애플 포트란이 AppleII용으로 소개되었다.


6월
보스턴, 토론토, 캐나다 등에 국지적인 지원 센터들이 설립되어, 각 지역의 애플 사용자들에게 편리함을 제공하게 되었다.



7월
시스템의 생산 주문이 계속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애플 사는 캐럴톤등에 생산 공장을 설립하여 시스템의 확대 생산을 개시하였다.



9월


전국 컴퓨터 협회에서 256KB의 메모리, 새로운 오퍼레이팅 시스템, 내장 디스크 컨트롤라 그리고 네 개의 확장 슬롯 장치를 지닌 획기적인 개인용 컴퓨터인 AppleIII가 3,495달러의 가격으로 소개되었는데, 애플 사의 야심작인 AppleIII는 애플 사의 개발 역사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로 평가받기 시작하였다. 해외 쪽으로 관심을 기울인 애플 사는 아일랜드에 새로운 공장을 설립하고 네덜란드의 자이스트에 유럽 지원 센터를 마련하였다.


11월
AppleII가 고등 교육 기관과 연구소를 위한 국제적 컴퓨터 네트웍인 EDUNET을 위한 네트웍 세부 시스템으로 결정되었다.



12월
애플 사는 주식을 공개하고 애플 사의 주식을 장당 22달러씩 4,600백만 달러 규모를 초기 물량으로 인수하였는데, 이것은 그 당시 단일사 규모로 가장 큰 주식 매각 액수이기도 하다. 이 무렵 애플사는 발전의 절정기를 구가하며 한번에 100명이라는 기술자를 대량으로 채용하기에 이르러 전체 종업원 수가 1,000명을 돌파하였으며 기본적인 교육 과정 항목을 제공하는 컴퓨터 문학 프로그램인 Apple Seed를 발표하였다. 애플사의 유통 채널이 미국과 캐나다의 전체 800개의 소매상으로 확산되고, 1,000개의 판매 창구가 설립되었는데 AppleIII의 발표와 더불어 AppleII를 위한 프로젝트가 애플사 내에서 자취를 감추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AppleIII는 AppleII와 호환되지 않는다는 결정적인 단점과 함께 거의 100%에 각까운 고장률을 나타냈고, 이에 따라 출하 시기를 1년 정도 지연시키는 등 결과적으로 실패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