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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스위치" 광고 캠페인의 철학적 고찰

본문


Infinite Loop

Switch and Narrative: Apple's New Ad Campaign

6-14-02 David Schultz

Caution: This article contains sentences which, if one has been weaned on the culture of fast images and the aberrant sounds of weirdness, the quickness of disturbing images, the loss of memory and time, the span of even a minute, let alone a day, or even an afternoon, like your morning, TV, which embeds and requires short temporal parts and bounds, being told by someone what is going, by the likes of 'anchors' and 'VJs', modern culture's new teachers, or probably sophists, and their ilk, one might have trouble following.

"애플, 드디어 글러브를 벗다." "애플이 드디어 플레이볼을 하다." 애플의 새로운 광고 캠페인을 묘사한 말이다. 그날 필자는 외근 등으로 웹에 못들어갔었고, 폭스 뉴스 채널에 나온 광고를 직접 볼 수 있었다. 이 광고를 보고 필자는 적잖이 기뻤는데, 다소 놀라운 사실은 광고 안에서 전혀 맥을 볼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마치 청바지에 구멍이라도 난 듯 했다. 그렇다. 무에서 유를 본 것이다. 따라서 본 칼럼에서는 이 캠페인의 의미와, 없음에서 있음을 나타내는 것을 알아보겠다.

필자는 바로 애플 사이트로 가서 스위치 광고를 모두 보았다. (이 광고는 한 페이지에 모두 나와있다.) 마치 푸르스트(Proust)를 차례대로 읽거나, 말러(Mahler)의 교향곡을 순서대로 듣는 기분이었다. 즉, 점차로 상승하는 분위기에서 갑자기 모든 것이 나왔음을 깨닫고 완전히 새로운 기분을 느끼는 것 같았다.

분명했다. 아마도 더 공부하고 더 읽어서 그런 지는 몰라도, 즉각적으로 뭔가를 깨달았다. 이런 느낌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삼위일체를 읽었을 때, 푸르스트를 파헤치려했을 때 느꼈던 감정이었다. 이 광고들은 분명히 우리를 어디엔가로 이끌고 있다. 증거 위주와 사실주의의 범람에 지겨웠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평생을 거쳐 좋아한 키에르케고르도 이런 느낌을 줬었다. 자꾸 느낌을 얘기하고 있지만 분명하다. 무에서의 유, 맥이 없는 광고에서 필자는 어디에서도 맥을 볼 수 있었다.

"정관(靜觀)은 사실, 신념(信念)의 보상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삼위일체, I.3.17)

아퀴나스가 이르기를, 우리가 신을 직접 알기보다는 간접적으로 아는 이유가 "그분의 역사(役事)를 통해서"라고 하였다. 당연히 아퀴나스는 이를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다섯 가지 방법"으로 이용하였다. 우주에서의 그분의 역사가 바로 궁극적인 이유라는 것이다. 그 이유 자체는 간접적인 역사의 현존을 통해야만 알 수 있다. 심지어는 아우구스티누스조차도 신에 대한 사고는, 변하지 않는 존재에 대해서, 끊임없는 변화를 주입하기 때문에, 우리의 개념을 넘어선다고 말했다. 하지만 창조주는 창조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 헛간의 앞은 보이지만, 뒤는 우리의 감각으로는 볼 수 없어도 그 존재를 알 수 있음과 비슷하다.

필자는 이 논리를 메가헤르츠 신화에서도 주장하였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필자가 옳은 경우, 환경을 좀더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은 알려지지 않은, 측정이 불가능한 힘이다. 따라서 기술의 가치란 이 기술을 사용하는 이의 느낌에 좌우된다. 이를테면, 하루종일 PC에 시달리다 집에 오는 필자의 부인은 전혀 충만한 힘을 느끼지 못하지만 항상 맥으로 작업하는 필자는 느낌이 매우 다르다. 분명히, 객관적인 정황이야말로 우리의 주관적인 반응과 효과를 제일 잘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이다. 즉, 우리의 주관적인 반응으로 객관적인 시비를 가릴 수 있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독자들에게 묻는다. 여러분이 무엇을 보지 못하는가? 맥이다. 무엇을 보는가? 사람들, 힘이 넘치는 맥 사용자들이다. 그들의 효과는 직접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말로만 전해지지만 "원하는 것"과 개성으로써 매우 효과적으로 주제를 전달해준다. 그들이 느끼는 바를 볼 수는 없다. 아퀴나스가 이르는대로,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증언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도 일종의 고도의 철학적인 증언이다. 증언이란, 예기치 못한 삶의 변화를 이야기함으로써 삶을 더욱 가치있게 만드는 행위이다. 사랑하는 독자들은 필자에게 말해주기 바란다. 이 광고가 그런 증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카메라 뒤로 가리키는 손가락은 분명 우리가 보지 못한다는 그 사실 때문에 더욱 현실적이지 않은가? 그것이야말로 진짜 증언이 아닐까?

필자가 얘기한 바를 되새겨 보기 바란다. 이 광고에서는 맥을 보일 필요가 없다. MP3를 만들어서 아이폿에 저장시키는 남자가 안나오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게도 강렬한 감정을 내비치는데 구태여 맥을 보일 이유가 무엇인가? 물론 윈텔에서도 이 모든 일들을 할 수 있다고들 주장하실 것이다. 하지만, 이 증언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직접 나서서 흄(Hume)의 말마따나 '우선적'인 발언으로, 데까르뜨가 명상록에서 바라는 바로 그 경험담을 외치는 데에다 대고 감히 반박할 수가 있을까? 쉽게 말하면, "배고파" "슬퍼" "네 친구를 싫어해"와 같은 말에다 대고 반박을 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럴 필요가 없다.

자, 증언을 해주는 이 멋진 사람들에 대해서, "이봐요. 난 그렇게 안느낀다고요."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지 않겠는가! 당연히 그 어느 누구도 감정에다 대고 반박할 수는 없다. (신 프로이트 주의자들은 참어주기 바란다.)

"PC가 아닌 맥을 사겠소"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맥을 사지 마시오"라고 말할 수 없는 법이다. "우선적"으로 말하는 그녀에게 어떻게 감히 "아니오"라고 상대할 수 있겠는가? 광고에서의 DJ가 자신의 아이북이 자기 "친구"라고 지칭할 때 우리 모두는 그녀의 말뜻을 알 수 있다. 당연히 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말이다. 언어와 사고의 차이는 바로 철학의 근간이며, 우리 모두 그녀가 진짜로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알고 있다.

그런 말을 하는 상대방에게, 기분을 북돋거나 말거나 하는 정도의 판단은 내릴 수 있다. 설사 동의하지 않더라도, 증언이 증언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철학적인 식견을 누구나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가 그렇다고 말하는데, 그런 "느낌"에 대한 말은 거짓이 아니다. 우리 자신의 두뇌로써 우리는 스스로 분석을 한다. 바로 증언의 성격이 그러하다. 하지만 증언의 수가 많아질 수록 신빙성은 떨어지기도 한다. 애플도 그점을 알았는 지, 대부분 X 세대인 증언자 여덟 명만을 웹에 게시하였다.

적어도 현실감있는 효과는 바로 증언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증언이 설득에 실패하면 사고 시스템도 실패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말을 고려할 때, 이런 감정적인 말을 깎아내리는 것은 평범한 현상은 아니다. 그럴 때는 무릇, 떨리거나 부자연스럽게 하기 마련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우리 사회는 이점 또한 잘 알고 있다.

사실 광고들 자체가 포스트모더니즘적이다. 그렇지 않은가? Lyotard(역주: 프랑스의 철학자, 쟝-프랑수아 료타르를 의미합니다. 1979년에 포스트모더니즘의 고전, La Condition Postmoderne을 펼쳐냈습니다.)가 말하기를, 포스트모더니즘은 메타내러티브(metanarrative)에 대한 불신이라고 했다. 하지만 전체 메타내러티브가 무너지면, 분명히 진실한 철학자들은 사적인 내러티브를 받들 것이다. 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 그(녀)의 이야기, 그들의 이야기는 그랜드 메타내러티브에 포함되지 않는 한 가치가 있다. 삶을 텍스트화시켜서 작성하고 말하고, 영위하라는 것이다. 소위 일컫는 진실을 경시하고, 그랜드메타내러티브를 뒤흔들라. 옳다. 이 광고에 맥이 없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기술 사제와 함께 논쟁을 통해, 우리 자신의 신화와 의식, 영웅, 반-영웅으로서 맥을 메타내러티브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맥에 관련된 웹을 만들면서 우리는 이를 좀더 작은 내러티브로 변화시켜왔다. 각 웹 사이트들은 만든이들의 증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메타내러티브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것은 아니며, 패러독스에 빠지고 만다. 여하간...

증거 주의는 여기에선 환영받지 못한다. 역사적인 참고 자료도 없으며, 자연적으로 생겨난 모든 필요한 영양을 갖춘 제한적인 토지에서 자라난 무한정한 열정이 있을 뿐이다. 사실, 그들 여덟 명이 모두 다른 여덟 개의 광고이다. 다시 말하건데, 이 광고에는 이성주의 대신 로맨티시즘이 자리잡고 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말하는 로맨티시즘은 이성을 넘어선 감성에 호소한다. 인간 드라마도 호기심에 충만하여 위험한 대자연, 조직에 반하여 생겨나기 마련 아닌가. 우리는 인간 정신의 상상력과 창조성, 예술에 대해 찬사를 보낸다. 로맨티시즘은 자기애에서 때때로는 타이타닉만큼의 규모로(나폴레옹과 프랑스 혁명을 돌이켜보라) 나타나게 마련이다.

처음에 언급했던 신학자들로 돌아서면, 특히 칼뱅파의 신교 전통을 알 수 있다. 초기 교회사에서 이성과 신념의 충돌에 앞서 Tertullianus(역주: 셉티미우스 플로렌스 테르툴리아누스는 제정 로마때, 크리스트교를 최초로 라틴어화된 교리로 만든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어에서는 보통 Tertullien이라고 일컫기 때문에 원문에서는 테르툴리안으로 나왔습니다.)는 "예루살렘이 아테네와 무슨 관계인가"를 물어보았다. 다시 말하건데, 쿠퍼티노와 레드몬드가 도대체 무슨 관계인가?! "이해를 추구하는 신념"인가, 아니면 "신념을 추구하는 이해"인가? 아마도 이해를 추구하는 신념으로 보기 쉽다. 도약하기 전까지, 애플을 알기 전까지는 맥을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신념을 갖지 않는 이상 신념을 추구할 수는 없다. 이것을 이성으로 재조작하는 것은 목표를 처음으로 눈앞에 두고서 포기하는 꼴, 시력 장애를 유지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의 눈은 시각 기관만이 아니다. "보이는 것"만을 보는 기관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의 눈은 바로 신념도 보여준다.

누군가는 "이해한다"라고 말하고, 다른이들은 맥이 "친구"가 됐다고, 맥의 "영혼"을 얘기하고, "도약"을 얘기하기도 한다. (여러분 모두 귀가 멀지 않았다면, 키에르케고르를 참고하기 바란다.) 이 모든 증언들을 필자가 얘기한 증언과 함께 생각해보자. 결론은 무엇인가? "여러가지 형태의 신앙을 단일한 표현으로 말하거나, 맥을 사용하는 데에서 생겨나는 종교적인 깨달음"이다.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그저 차례대로 광고를 살펴보기 바란다. 이 광고 캠페인은 신념의 도약을 이룰 수 있는 그 매킨토시를 얘기하고 있다. 한 번 만들어진 맥 영혼을 신념의 형태로, 열정의 형태로 만듦으로써 여러분은 맥을 이해하고, 세계를, 여러분 자신을,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의 PC를 볼 수 있다.

씽크 디퍼런트로 도약을 이루자.

- David Schul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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