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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디자인 이야기(1992-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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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애플 디자인 이야기(1992-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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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Oral History Of Apple Design: 1992–2013

THE GREATEST BUSINESS STORY OF THIS GENERATION IS A DESIGN TALE.

애플에서 디자인하기를 설명하려는 노력은 대부분, 마치 애플에게만 고유한듯 한 단순함과 품질, 완벽주의의 결합이 이뤄낸 복잡다단한 37년을 압축하기로 끝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본지가 애플 디자인을 도운 사람들이 말하듯, 신호의 해석(decoding of the signature)이라 할 수 있을 애플 디자인의 구술사(口述史)를 통해 그 결핍을 고쳐보기로 나섰다. 다른 곳에서는 출판된 바가 없었던 더 길다란 버전, Design Crazy는 오리지널 전자책으로 Byliner에서 구매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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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의 세련된 텔레비전 광고, "This is our signature"가 주장하듯, 애플이 제품 후면에 박아 놓는 친숙한 단어들이 있다. designed by Apple in California. 이 광고는 "1984" 수퍼볼 광고(흥미로운 제목이지만 대단히 많은 이야기를 하는 광고다)로부터 시작된 원대한 애플의 전통에 들어 맞는다. 단 애플은 전세계에서 제일 경쟁력이 강하면서도 병적으로 비밀스러운 조직이기도 하다.

애플의 CEO 팀 쿡(Tim Cook)이 알리고 싶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다면, 애플의 "signature" 뒤에 무엇이 있느냐이다. 결과적으로 애플에서 디자인하기를 설명하려는 노력은 대부분, 마치 애플에게만 고유한듯 한 단순함과 품질, 완벽주의의 결합이 이뤄낸 복잡다단한 37년을 압축하기로 끝나게 마련이다.

Sir Jonathan Ive

그래서 본지가 그 결핍을 고쳐보기로 나섰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1996년 책임자에 오른 조너선 아이브(Jonathan Ive)경의 산업디자인 그룹에서 나온 디자이너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만 둔 사람이 두 명, 죽은 사람이 세 명이었다. (그만 둔 두 명은 물론 오랜 애플 전직 직원 십여 명과 대화를 나눴다.) 그 결과 우리는 지난 20년간 제일 위대한 비즈니스 이야기를 발견해냈다. 거의 부도 상황에 있던 애플이 어떻게 세계에서 제일 가치 높은 기업이 됐는지, 사람들이 정말 완전히 잘못 생각들 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오랜 기간 동안 CEO였던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문제 없이 조화롭게 다룰 줄 알았던 챔피언이었기 때문에, 애플이 협력의 모범이 됐다는 인식이 외부인들에게는 전통적이다. 그러나 정작 사실은 정반대다. 더군다나 1985년 잡스의 축출과 1997년의 복귀는 잡스가 Pixar 와 NeXT를 운영할 때 이미 애플의 부활이 있었으며, 그것을 이끈 것이 중요한 디자인이었다는 사실을 가리고 있다. "나를 제외하면 애플의 누구보다도 훨씬 더 운영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 바 있던 아이브가 애플에 입사했던 때는 1992년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 2012년, 아이브는 소프트웨어를 업무분장에 포함 시켰다. 권력이 더욱 더 강대해진 것이다.

아이브는 물론 애플 내 그 누구도 이 기사를 위한 기록을 남기려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 이야기는 애플에 대해 들어 왔던 다른 이야기와는 상당히 다르다. 애플 디자인의 구술사이자, 애플 디자인을 도운 사람들이 말하듯, 신호의 해석(decoding of the signature)을 하기 때문이다. 그 뿌리는 컴퓨터가 "마음의 자전거"라 표현했던 잡스의 비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이테크를 단순하고 누구나 다룰 수 있는 기기로 바꾸려는 야망이 담긴 표현이자 애플 디자인의 시금석이 된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 1985년 잡스가 애플로부터 축출되자마자 애플은 상업적인 성공을 좀 거두기는 했었다. 부분적으로는 Frog Design (현재 Frog)의 에슬링거(Hartmut Esslinger) 덕분이다. 그렇지만 에슬링거는 1980년대 후반 잡스를 따라 넥스트로 옮겼고 1990년대까지 같이 했었다. 그동안 애플은 또 하나의 PC 업체로서 노력했지만 시장 점유율은 줄어들었었다. 우리의 디자인 대화는 어두웠던 그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강인한 소수가 잡스의 이상을 지키려 애쓸 때, 영국에서 온 부드러운 목소리의 젊은 산업 디자이너가 애플에게 희망을 불러 일으켰었다.


1992 "Here lies the guy who hired Jonathan Ive"


애플 산업디자인 그룹의 창립자인 로버트 브러너(Robert Brunner, 현재는 Ammunition의 창업자이자, Beats headphones의 디자이너이다)는 이런 농담을 하곤 한다. 자기가 죽으면 묘비에 쓰일 말이 뻔하다면서 말이다. "여기 조너선 아이브를 임명한 이가 누워 있도다."

"장학금 과정을 위해 조너선이 제 예전 회사인 Lunar에 나타났었죠. 모델들을 갖고 온 조용하고 예의 바른 영국 청년이었습니다. 물론 잘 디자인된 것들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자기가 만들어냈더군요. 와, 팀에 꼭 데려와야 할 놈이라 여겼죠.

1989년 애플에 처음 갔을 때 혹시 애플에 와서 일해 보겠냐고 조니에게 전화를 했었지만 그때는 노였어요. 자기 회사인 Tangerine을 막 시작했고 회사를 꾸려가고 싶어 했었죠. 1992년, 저는 Juggernaut라 불리는 휴대용 제품 프로젝트를 위해 Tangerine을 고용했었어요. 애플에 혹시 관심을 불러 일으킬 수 있을까 싶었던 이유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멋진 모델을 만들었더군요. 보여주려고 조니가 왔을 때, 캘리포니아의 전형적인 아름답고 맑은 주말이었습니다. 혹시 관심 있냐 다시 물어 봤죠. 그 때는 예스였습니다.

마이어호퍼(THOMAS MEYERHOFFER)는 수석 산업 디자이너로서 아이브를 처음 고용했던 인물이고, 현재는 자신의 디자인 사무소를 운영중이다

애플을 위한 경쟁력 있는 툴로서 디자인을 앞세우고 싶었지만, 디자인이 뭘 할 수 있는지 이해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애플은 다르다. 애플은 언제나 달랐다고 우리가 엄청나게 주장했었죠.

BRUNNER: 우리 팀에 eMate 작업을 했던 마이어호퍼가 있었죠. [프로토 태블릿] 뉴튼의 본체와 운영체제를 클램셸(clamshell) 안에 집어 넣었습니다. 아이를 위한 매우 간단한 컴퓨터를 만들자는 아이디어였죠. 투명하고 둥글납작한 아이맥의 시작이 바로 eMate였습니다.

MEYERHOFFER: 이전까지의 모든 노트북은 사각형의 베이지색 플라스틱 덩어리였어요. 이 제품을 재미나고 가볍게 보이고 싶었어요. 베이지색 박스 안에 뭐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뭔가 영리한 것이 있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투명한 플라스틱을 사용했어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요. 제품에게 보다 더 많은 생명을 준 겁니다.

샛츠거(DOUG SATZGER)는 산업 디자인 팀의 리더였으며 현재는 Intel 산업디자인 팀 부사장이다.

멋진 개념을 매우 많아 작업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CEO인 아멜리오(Gil Amelio)에게 디자인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어요. 제품을 디자인하면 마케팅부가 와서 "처음에 $15 주고 만들라 했더니 이건 비용이 $20이다. 그러니 델 컴퓨터나 캐넌 프린터 마크를 달 거다." 당시 애플은 디자인이나 제품 제조에 신경 쓰는 곳이 아니라 마케팅 회사였어요. 이런 식으로 계속 가면 아무래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조니도 알고 있었죠. 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전체 팀이 어떻게 될지 같이 논의했었습니다.



그동안 소프트웨어 부서의 상황은 더 안 좋았다. 애플 운영체제가 훨씬 우월한 윈도 95에게 추월당했기 때문이다.



라츨라프(CORDELL RATZLAFF)은 Mac OS 휴먼인터페이스 그룹의 관리자였으며, 현재는 Google의 사용자 경험부 부장이다.

애플의 차세대 운영체제로 나올 예정이던 코플랜드(Copland)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코플랜드는 아마 애플 최악의 관리 프로젝트였을 겁니다. 몇 년 후, 코플랜드가 절대로 완성되지 못 할 것임이 확실해졌죠.

린제이(DON LINDSAY)는 Mac OS 사용자 경험 그룹의 디자인부장이었으며 현재는 BlackBerry의 사용자 경험부 부사장이다.

곧 뒤이어 넥스트를 애플이 인수했고, 당연히 스티브 잡스의 패키지와 함께였습니다.


1998 "Good enough to lick"

1996년 12월, 4억 2,900만 달러로 애플은 넥스트를 인수했고, 잡스는 이듬해 여름, 애플의 임시 CEO가 된다. 그의 첫 번째 움직임 중 하나가 아이브와의 팀 구성이었다. 아이브는 브러너를 대신하여 1996년에 산업디자인 그룹의 책임자가 됐으며, 애플의 데스크톱 컴퓨터를 다시 디자인하기로 했는데, 당시 아이브의 나이는 고작 서른 살이었다.

SATZGER: 우리와 처음 스티브가 인터뷰를 할 때, 우리는 스튜디오를 정리하고 있었어요. 스티브 잡스 목소리가 크고, 자기가 얘기할 때는 집중하고 싶어한다는 점을 우리도 알고 있었습니다. 문에서 걸어 들어올 때 음악을 틀었죠. 그래야 대화 상대와 집중할 수 있으니까요.


Robert Brunner, 애플 산업디자인 그룹의 창립자
"We took the guts of the newton and put it in a clamshell. That’s where the bulbous form of the iMac got started."



Jeff Zwerner, 전직 포장 및 크리에이티브 부장,
"We were kind of like, Who needs another Walkman? It wasn’t until the iTunes store that everyone was like, this is gonna be phenomenal."

춰너(JEFF ZWERNER)는 포장 및 크리에이티브 부장이었으며 현재는 Evernote의 부사장이다.

조니는 테크노 음악이 울리는 가운데에서 스티브가 편안하게 느끼게 하도록 스튜디오 내 공간을 모두 다 손수 조정해 놓았었죠. 스티브가 들어오면 모두가 느리게, 하지만 꼭 방 안의 다른 쪽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어요.

루빈스타인(JON RUBINSTEIN)은 전직 하드웨어 엔지니어링부 부사장으로서, 2004년까지 아이브의 상관이었으며, 현재는 Amazon의 이사진으로 있다.

스티브는 스튜디오에서 아주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행복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업하기가 디자인 팀하고 놀기만큼 재미있지가 않았어요.

SATZGER: 스티브는 인터넷 컴퓨터를 원한다고 말했었어요. 딸이 대학에 가는데 학교에 가져갈 만큼 좋은 컴퓨터를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스티브는 하드 드라이브가 필요 없는 제품 구상을 갖고 있었죠.

RUBINSTEIN: 네트워크 컴퓨터는 잘 안 돌아갔어요. 그만큼 인터넷 대역폭이 충분하지 않았으니까요. 오리지널 디자인은 아이맥이 될 컴퓨터를 줄여버린 버전처럼 보였습니다. 키보드를 넣을 수 있는 터널이 마치 아무 것도 안에 없듯 밑에 있었어요.

서갤(KEN SEGALL)은 Chiat/Day의 크리에이티브 부장이었으며 현재는 저자이자 컨설턴트였다.

우리가 아이맥 프로토타입을 처음 봤을 때,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천을 들어내자, 컴퓨터 본체가 보였죠. 마치 미래의 만화 버전 같았습니다.

스티브가 발표 후 내려오자마자 발하더군요. "아이맥이 좋아. 하지만 색상이 틀렸어."
코비(TIM KOBE)는 맥월드 컨퍼런스의 디스플레이 디자인 작업을 했던 건축사무소, Eight Inc.의 공동창업자였으며, 현재는 Apple Stores 디자인 작업을 하고 있다.

스티브가 이렇게 말했어요. "해야 할 일은 딱 이 단어, 컬러입니다. 망했어요." 컬러가 있고 개성이 있다. 이것이 사고의 전환이었습니다. 이 핵심 아이디어에 너무나 민감해 했었죠.

SATZGER: 본다이블루 아이맥을 만들었죠. 스티브가 발표 후 내려오자마자 발하더군요. "아이맥이 좋아. 하지만 색상이 틀렸어."

호킨스(TRIP HAWKINS)는 전직 애플 리사(Lisa) 그룹의 마케팅/제품 관리자였으며 후에 Electronic Arts를 창업했다.

저는 그냥 모니터를 섹시하게 만들었구나 여겼어요. 이제까지 아무도 저렇게 안 했으니까요.



다섯 가지 사탕 색깔로 제공된 아이맥은 히트작이었으며, 사무용 장비가 아니라 가정용 제품처럼 느껴지는 최초의 컴퓨터였다. 회사 전반에 걸친 잡스의 재-디자인 다음 단계는 소프트웨어였다.



LINDSAY: 아이맥을 선보이기 직전, 스티브는 맥오에스텐의 사용자 경험으로 관심을 돌렸어요. 소프트웨어 디자인 팀을 모두 방에 불러들였죠. 전형적인 스티브 스타일입니다. 방 안의 모두가 다 천치라고 선언했으니까요.

RATZLAFF: 그때부터 내리막이었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바람직한 맥오에스텐 프로토타입 구축에 매달렸습니다. 다른 운영체제 전부 다 생각해 보는 것부터가 출발이었어요. 모두들 거창하고 어두웠으며, 우울하고 두툼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접근은 정반대로 하자였죠. 프로토타입에는 독에 대한 초기 아이디어와 함께, 디지털 허브로서의 맥, 완전히 새로운 컬러 스킴, 애니메이션이 있었습니다.

LINDSAY: 스티브의 인식은 하드웨어였어요. 당시 하드웨어는 투명함과 빛남(glossiness), 컬러라 할 수 있었고, 스티브는 인터페이스에도 그런 면을 도입하고 있었습니다.

RATZLAFF: 화요일 오후마다 스티브를 만났습니다. 그가 미친 아이디어를 꺼내곤 했어요. 한 번은, 모든 에러 메시지를 하이쿠로 하자고 하더군요. 그가 나가고 나서 우리 모두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스티브가 뭔 약을 빠는 거지?

한 번은 회의중에 스티브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핥을 만큼 보기 좋아졌으면 좋겠어." 그 회의 후, 디자이너 하나가 자기 모니터에 반쯤 핥은 사탕(Life Saver)을 붙여 놓았습니다.



아쿠아(Aqua)로 알려졌던 새로운 사용자-인터페이스 시스템은 화면 하단에 고정된 독을 사용하고, 시각적 메타포와 애니메이션에 상당히 의존했다. 아쿠아는 오에스텐과 iOS 모두의 현대적인 버전으로 진화했고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 외 주요 소프트웨어 업체 거의 전부에게 분명 큰 영향을 끼쳤다.



2000 "He wanted to control everything that touched his product"

워커(DAN WALKER)는 인사부장이었으며 현재도 인력관리 컨설턴트를 하고 있다.

Orange County의 부엌에 있었는데 부인이 전화기에 대고 하는 말이 들리더군요. "맞아요. 그양반 있어요." 그러고서는 전화기를 제게 주면서 말하더군요. "스티브 잡스야." 잡스는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이사진에 있는 미키 드렉슬러(Mickey Drexler, GAP의 CEO였고, J.Crew의 사장이자 1999년부터 애플 이사)가 당신에게 전화해야 한답디다. 애플 브랜드를 위한 소매점 개장을 생각하고 있어요. 와서 얘기 좀 하실 수 있을지?" [당시 워커는 GAP에서 드렉슬러와 함께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 애플 본사 4층에 갔어요. 엘레베이터 맞은편이 스티브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이야기를 꼭 해야 할 필요가 있는 프리미엄 제품을 만들고 있다면서, 자기 제품에 손대는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싶다더군요. 고안, 제조, 유통, 소비자 등 모두요.



드렉슬러는 물론 워커의 조언에 힘입은 잡스는 소매점을 위한 팀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이 팀을 이끈 이는 전직 Target 중역이었던 론 존슨(Ron Johnson)이었다. 목표는 크게 성공한 아이브의 아이맥에 대한 열풍을, 다음 단계 애플 디자인의 핵심으로 이끌자는 아이디어였다. 다름 아닌 디지털 허브이다.


George Blankenship 전직 용지개발부(real estate development) 부사장

"We had to go to the heart of the malls and have people stumble on us when they weren't thinking about buying a computer."


Abigail Sarah Brody 전직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이너

"I wasn't told I'd be working on a phone. They just said, 'Create a user interface for multitouch."

KOBE: 애플 스토어 프로그램을 위해 처음 고용된 사람이 저하고, 파트너인 울(Wilhelm Oehl)이었어요. 1999년에 스티브와 함께 칠판 하나 갖고 시작했죠. 스티브는 우리에게 굉장히 질문을 많이 했습니다. 가령 "나이키 스토어는 얼마나 큰가?"였죠. 스티브는 제품을 스토어에 잔뜩 보이고 싶어했지만 당시 애플에게는 데스크톱 두 가지, 노트북 두 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소프트웨어도 많지 않았구요. 그래서 사진 구역이라든가 어린이 구역, 지니어스바, 극장 등 다른 일을 위한 공간을 세우기로 했죠. 기술에 있어서 대부분 받는 경험과 차별 시켜주는 경험을 만들어 주려 했던 결과입니다.

WALKER: 론 존슨은 무슨 일을 할지 토론을 벌였습니다. 리츠칼튼 호텔 고객 서비스 총책임자와 CompUSA에서 맥을 팔아 봤던 청년 둘이 있었죠. 스토어를 디자인할 건축가와 정말 뛰어난 그래픽 아티스트도 있었어요. 며칠간 방에 앉아 있었어요. 지니어스바가 여기서 만들어졌습니다. 론이 열심히 스케치하던 기억이 지금도 납니다.

크레이머(MICHAEL KRAMER)는 애플 소매사업 및 CFO였고 나중에는 JCPenney에서 COO를 지냈다.

론이 제게 지니어스바에 대해 말했을 때 얼마냐 크냐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각 스토어마다 다섯 씩이라더군요. "아니, 그러면 판매직 담당 중 20%를 끌어내겠다는 의미야?" 했더니 그렇답니다. "우리가 뭘 바꿀 것이지?" "아무 것도." CFO 대다수는 미쳤냐고 할 일이었어요. 하지만 애플에서라면 제아무리 재무 담당이라 하더라도 사업의 창조적인 측면을 숭배해야 합니다. 어떻게든 예스라고 할 방법을 찾아내야 하죠.



KOBE: 스티브 때문에 론이 상당히 좌절했음을 알았어요. 소매점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무엇이든지 간에 론은 교과서스러운 답을 내지만, 스티브는 언제나 몇 도 뒤틀거든요. 스티브가 비열할 뿐이라고 생각하기는 합니다만 나중에 알고보니 아니었어요. 최고의 경쟁자들이 어떻게 할까에 대한 전통적인 지혜가 어떤지, 스티브가 론을 바로미터로 삼았던 겁니다. 그때문에 론이 정말 미칠 지경이었을 것이에요.

소매점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무엇이든지 간에 론은 교과서스러운 답을 내지만, 스티브는 언제나 몇 도 뒤틀거든요.
블랭큰십(GEORGE BLANKENSHIP)은 용지부(real estate) 부사장이었으며, 현재는 Tesla Motors의 부사장이다.

리테일은 론 책임이지만 그 지침은 스티브였습니다. 매주 화요일 아침마다 스티브와 만나서 3시간 동안 스토어 디자인을 논의했어요. 첫 스토어를 개장하기 전에, 쿠퍼티노 창고 안에다가 완전한 크기의 스토어 4채를 지었습니다. 3채는 파기했고 나머지도 절반을 버렸죠. 하나는 맥월드와 같은 전시회같은 분위기였고, 하나는 너무 박물관스러웠어요. 그래서 결국 콩팥처럼 생긴 탁자로 스토어 디자인을 하게 됐습니다.

KOBE: 우선은 하얀색 Corian 탁자부터 시작했어요. 첫 번째 팔 제품들 색상이 밝았고, 좋아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중성적인 팔레트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제품들이 점차 하얗게 되어 가면서는 단풍나무 재질 탁자로 바꿨습니다.

SATZGER: 5 피트/10 피트에 36 인치의 높이의 탁자 배열이요? 산업디자인 스튜디오에서 나왔습니다. 애플 스토어에 얼마나 장식이 없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거 다 산업디자인 스튜디오 모양입니다.

BLANKENSHIP: 컴퓨터 구매같은 것 생각을 안 할 때 우리를 발견하게 해야 했죠. 몰 중심부로 가야 했습니다.

KOBE: 유용성과 반대되는 의미로서, 결과만큼이나 감정적이기를 원했어요. 바로 애플 디자인의 핵심 성격입니다.



최초의 애플스토어는 2001년 5월 19일, 버지니아의 Tysons Corner에 세워졌다. 다음 날 BusinessWeek는 "Sorry, Steve: Here's Why Apple Stores Won't Work"라는 칼럼을 올렸다. 이 칼럼은 "미학적으로 완벽주의적인 잡스"이기 때문에 그 비싼 부동산을 대여해서 "그저 소비자용 맥 몇 대 더 팔아보려는 데에 집중"하기로 한 결정을 조롱하는 내용이었다. 선견지명이 없었던 칼럼이다. 오늘날 애플스토어는 412 곳이며, 매년 1 평방피트당 $6,000을 벌어들인다. 그 어느 소매점보다 두 배 이상의 너비당 평균 판매액이다.

KOBE: 첫 두서너 해 동안 사람들은 스토어가 아니라 스토어에서의 경험을 얘기하더군요. 일하는 직원들이 너무 달랐고, 기술을 이용하는 경험이 너무나 달랐다는 말이었습니다.

피셔(MIKE FISHER)는 시각판촉(visual merchandising) 부장이었으며 나중에는 JCPenney의 광고 책임자가 됐다.

컴퓨터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컴퓨터였던 제품의 섹시함을 팔아야 했죠.



2001 "Then apple's design became experiential"


퍼델(TONY FADELL) 아이포드부 수석부사장이었으며 현재는 Nest Labs의 CEO이다.

애플에서의 디자인은 2001년 정도까지 제품, 제품, 그리고 제품이었습니다. 그 이후의 애플 디자인은 경험(experiential)이 됐죠. 아이포드라는 제품, 그리고 그 제품에 딸린 소프트웨어인 아이튠스, 그리고 소매 경험. 오늘날 우리가 아는 애플 디자인 철학의 탄생이 여기에 있습니다.

WALKER: 개인용 컴퓨터가 이제 죽었다는 멍청한 말들이 있죠. 스티브가 어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는지는 절대로 모를 겁니다만, 어느 날 갑자기 와서는 다른 사람 아이디어가 자기 아이디어라 말할 때가 종종 있었어요. 어느날 일어나 보이, 컴퓨터가 죽었을 뿐 아니라, 이전보다 훨씬 더 중요해졌다는 식입니다. 컴퓨터는 사진과 작업, 음악 등 생태계의 중심이라는 말이죠.





2001년 1월 맥월드 무대에서 잡스는 단순한 MP3 애플리케이션인 아이튠스를 발표하면서 "디지털 허브" 개념을 선보였다. 아이튠스로 맥 사용자는 곡 목록을 따로 CD로 굽거나 인터넷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RUBINSTEIN: 맥과 함께 쓸 수 있는 모든 장비를 다 알아보는 중이었습니다. 카메라에서는 그다지 우리가 내세울 것이 별로 없겠더군요. 휴대폰과 PDA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휴대폰이 결국은 PDA를 발목 잡으리라 결론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뮤직 플레이어 부문이야말로 딱히 경쟁사라 할 곳이 없음을 알아냈죠. 그 시장 제품들은 쓰레기들이었습니다.


Tony Fadell 전직 아이포드부 수석 부사장

"The idea was "1,000 songs in your pocket"--a long-battery-life device that syncs with the Mac."


Loren Brichter 전직 그래픽 엔지니어

"I'm really happy they did something big [with iOS 7]. It's more than just the veneer."

WALKER: 깊고 깊은 연구개발 활동으로 아이포드가 생겨났다고 말씀 드리고 싶지만 아이포드는 그런 식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존 루빈스타인이 일본의 도시바 공장에 있었기 때문에 시작됐다 할 수 있죠. 도시바에 작은 하드 드라이브가 있었고, 루빈스타인은 그 하드디스크에서 잠재력을 알아 봤습니다.

RUBINSTEIN: 우리 제품 로드맵에 어떻게 부품들이 맞는지 알아보고 공급업체들을 검토하기 위해 자주 방문을 했습니다. 도시바로 갔더니 회의 막바지에 1.8 인치 하드 드라이브를 보여주더군요. 그걸로 뭘 어떻게 할지 도시바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일단 만들 수 있는 것 다 우리가 사겠소"라 말했어요. 그리고 스티브에게 가서 "스티브, 천 만 달러가 필요합니다."라 청했어요. 그때 저는 팀 관리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토니를 찾았을 때죠.

FADELL: 그 하드 드라이브 말이죠. 지구상에 그런 게 없었어요. 아이포드를 돌리게 한 장본인이죠. 이전에 있었던 Fuse Systems에서 가정용 스테레오를 위한 MP3 플레이어를 만들었었는데, 그렇게 작은 디스크가 없어서 랙-마운트로 만들었었습니다.

RUBINSTEIN: 아이디어가 있다고 말할 때 역사를 다시 쓰려 노력했던 사람이 토니입니다. 게다가 독립적으로 작업중이었죠. 완전히 터무니 없었습니다.

SATZGER: 아이포드의 창조자를 찾으라면 조니를 말합니다. "아이포드의 대부"는 토니입니다. 그리고 "미스터 아이팟" 루빈스타인도 있죠. 아이포드를 만들었을 때 세상을 바꾼 팀이라는 점을 이들 아무도 못 받아들일 것 같군요.



아이포드를 만들었을 때 세상을 바꾼 팀이라는 점을 이들 아무도 못 받아들일 것 같군요.
FADELL: 2001년 1월, 계약직으로 시작했습니다. "주머니 안의 천 곡"으로 긴 배터리 수명을 가졌으며 맥과 싱크하자는 아이디어였어요. 3월 네 번째 주에 첫 번째 디자인을 스티브에게 보여줬습니다. 네비게이션 컨트롤을 갖고 있었는데 [마케팅 책임자] 필 실러가 "조그셔틀 휠을 달아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그거였어요. 한 시간 짜리 회의에서 모든 일이 일어났습니다. 일단 고무 모델을 만들고, 다듬으라고 조니에게 보냈어요.

SATZGER: 토니가 담배 상자 크기만한 고무 모델을 갖고 왔었죠. 부드러운 모양과 금속, 2중사출(double-shot) 플라스틱을 알아보고 사용햇죠. 너무 과감하게 할 순 없었습니다. 본체 크기는 정말 부품에 좌우됐으니까요.

FADELL: 기본적으로 금속 뒷면과 플라스틱 앞면을 합친 형태입니다. 그렇게 해야 정말 빠르게 만들 수 있었으니까요. 아이포드가 나오자, 우리 제품 모두가 다 아이포드처럼 보이기 시작했어요. 다 같은 언어였습니다.



아이포드의 미니멀리즘 디자인은 독창적이었다. 아이브의 팀은 그 후로도 G4 큐브 데스크톱과 아이포드 직전에 나온 타이태니엄 파워북 G4 등 수년간 유사한 디자인을 유지했다.



RUBINSTEIN: 큐브는 우리의 유일한 진짜 실패작이었습니다. 실제로는 훌륭한 제품이었지만 너무 비쌌죠. 그래도 재료와 곡선형 플라스틱, 터치 스위치에 대해 정말 많은 것을 배웠어요. 산업 디자인의 거대한 사례였거든요. 큐브는 우리 미래 제품 거의 전부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SATZGER: 시장은 이제 투명한 제품 이상으로 자라났었어요. 아이맥 직후에는 타이태니엄 파워북을 했고, 그 다음에는 하얀색 아이북으로 아이북을 재단장했죠. 하얀색은 정말 조니의 작품입니다. 공급업체들한테 가서 제일 하얀색 중에서도 하얗게 나와야 한다고 얘기했었어요. 타이태니엄을 기본수지(base resin)에 넣어서 한계까지 밀고나니까, 푸른색 수준도 확실히 조정하도록 해야 했어요. 푸른색이 너무 많으면 세탁기처럼 보이니까요.

LINDSAY: 스티브는 항상 한 단계 앞서 가기를 원했습니다. 업계가 컬러와 핥기를 따라하기 시작하자, 우리는 다른 길을 가야한다는 점을 스티브, 조니, 저 모두 깨달았어요. 이제는 미니멀리즘으로, 컬러를 덜 쓰고 패턴과 텍스처에 더 신경을 쓰자였습니다. 디자인에 다른 영감을 주자는 것이었죠.

ZWERNER: 워크맨을 또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의 입장이었습니다. 아이포드 디자인은 근사했지만 아이포드는 MP3 플레이어일 뿐이었어요. 아이포드는 계속 머물러 있었고, 아이튠스 스토어가 등장하고나서야, 이거 완전 물건이 되겠다는 기분이었죠.



2004 "The holy of holies"

2003년 4월에 나온 3세대 아이포드는 더 얇아지고 새로운 내비게이션 휠을 장비했다. 이와 동시에 잡스는 아이튠스 스토어를 개장한다. 애플은 2003년 200만 대의 아이포드(2001년 9월부터 2002년까지 판매했던 양의 두 배 이상이었다)를 판매했다. 2004년에 나온 아이포드 미니는 판매량이 다섯 배로 늘어났다. 아이포드도 이제는 아예 독립 부서로 나뉘어졌고, 총책임자는 루빈스타인이었다. 그때까지 루빈스타인에게 보고했던 아이브는 이제 잡스에게 직접 보고하기 시작한다. 아이브는 자신의 엘리트 산업 디자이너들에게 힘을 집중 시킬 수 있었다.



SATZGER: 산업 디자인 스튜디오에 있던 우리들은 꼼짝 없이 갇혀야 했습니다.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면 속해 있는 것 또한 아니라고 스티브가 못 박아 뒀거든요. 팀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디자인에 대해 전혀 얘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확실히 한 것이죠.

래머딩(ERIK LAMMERDING)은 개발자 관계부 수석 관리자였으며, 현재는 N3twork의 공동 창업자이다/

비밀의 방에 들어갈 허가를 전혀 못 받았습니다. Get Smart 드라마 기억하시나요? Duh-dun, duh-dun, duh-dun--chish chish chish. 키카드 몇 개 광택 없는 유리, 성스러운 것 중에서도 성스러운 것(The Holy of Holies) 말입니다.

스티븐슨(BOB STEVENSON) 크리에이티브 수석이었으며 현재는 N3twork의 공동창업자이다.

한 번 갔었습니다. 영화 2010년의 마지막 장면 혹시 아시나요? 큐브릭의 2001: A Space Odyssey 후속작 말씀입니다. 마치 미래에서 온 인류가 있는 곳 같은 느낌이었어요.

컴펠(JEREMY KUEMPEL)은 아이패드 제품 디자인 인턴이었다.

문까지는 갔었죠. 자바헛의 궁전에 갔더니 눈알이 튀어 나와서 [한 솔로를] 바라봤던 스타워즈의 장면 보셨나요? 그런 느낌이었어요.

SATZGER: 스튜디오는 만에서 만 오천 평방피트 정도입니다. 놀라운 곳이죠. 걸어 들어갈 때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어진, 10 피트 정도 되는 이 작은 복도를 지나게 됩니다. 그러면 콘크리트와 유리로 돼 있는 곳이 열리죠. 천장은 금속재입니다.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이 있으며, 중앙에는 거대한 어항처럼 유리로 된 섹션이 있어요. 조니는 3면이 벽으로 된 방을 갖고 있습니다. 마크 뉴슨(Mark Newson)이 개별적으로 디자인한 책상과 의자, 2개의 서랍장을 조니가 갖고 있던 장면이 기억나는데요. 탁자에는 온갖 종류의 색연필과 Tolomeo 램프, 컴퓨터가 놓여 있습니다. 가족과 아이들 사진도 없어요. 사실 스튜디오 전체 벽면에 전혀 사진이 없습니다.

RUBINSTEIN: 제 임무는 온갖 다른 팀으로부터 나오는 온갖 요구사항을 관리하여 일을 해내는 것이었습니다. 나쁜 상사 역할이죠. 스티브는 나쁜 상사 역할하기를 안 좋아해서, 제 역할이 그것이었습니다.

SATZGER: 조니와 스티브는 사무실 바깥에서 굉장히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고, 사업 계획과 제품에 대한 얘기를 했어요. 조니는 스티브가 굉장히 많은 것을 자기 아이디어라 했다며 불평했습니다. 조니에게는 애플 내에서 자신의 위치와 관계된 매우 정치적인 어젠다를 갖고 있어요. 제게 이런 말을 했었죠. "스티브와 만날 때마다 내게 알려달라"고요. 이 말을 부드러운 영국 신사 억양으로 해서 성격을 드러내는 겁니다.

조니 방식이 아니라고 조니가 결정했기 때문에, 애플을 나간 사람이 많이 있죠.

RUBINSTEIN: 좋은 이미지이죠. 겁을 주되 술렁거리지는 않게 하라이니까요.

SATZGER: 하지만 디자이너가 아니면서 디자인 책임자에게 도전한다면, 그에 따른 결과가 있습니다. 조니 방식이 아니라고 조니가 결정했기 때문에, 애플을 나간 사람이 많이 있죠.

RUBINSTEIN: 파워북 안테나에 대해, 조니와 제가 언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뚜껑 크기 때문에요. 물론 타협을 봤죠. 솔직히는 성능에서 타협을 본 겁니다. 물리 법칙을 어길 수는 없으니까요.



월터 아이작슨(Walter Isaacson의 책, 스티브 잡스(Steve Jobs)에서 보면 아이브는 루빈스타인이 안 떠나면 자기가 떠나겠노라 위협한 적이 있었다. 2006년 루빈스타인은 은퇴를 발표하고 1년 후 PALM의 CEO가 됐고, 아이포드부를 맡고 있던 퍼델은 새로운 최고 기밀 제품을 별도로 준비하고 있었다.



로저스(MATT ROGERS)는 아이포드부의 펌웨어 엔지니어였으며, 현재는 Nest를 퍼델과 공동 창업했다.

이 비밀 프로젝트를 2005년에 시작했을 때 우리 팀은 정말 소규모였습니다. 하드웨어 엔지니어 1명, 안테나 전문가 1명, 프로젝트 관리자 1명 뿐이었으니까요. 우리가 아마 해마다 100만 개 정도 팔리라 생각했던 사람이 애플에 굉장히 많았습니다. 높은 목표였죠.

FADELL: 아이포드 미니를 휴대폰으로 만들기가 시작이었어요. 실제로 클릭휠을 가진 휴대폰을 만들었습니다. 옛날 전화기처럼 돌아갔죠.

ROGERS: 하지만 그런 전화기를 아무도 원하지 않죠.

그리뇬(ANDY GRIGNON)은 아이폰부의 수석 관리자였으며 현재는 Quake Labs의 공동창업자이다.

애플은 멀티터치 키보드를 만들었던 FingerWorks를 인수합니다. 그래서 완전한 터치스크린 기반의 플랫폼을 전화기용으로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어요.

SATZGER: 멀티터치의 초기 개념은 태블릿-컴퓨터 논의에서 나왔습니다. PC를 태블릿으로 어떻게 하면 만들까가 항상 화제였습니다. 그런데 커(Duncan Kerr, 아이브 그룹의 디자이너)는 몇 시간이고 멀티터치에 대해서만 떠들어댔습니다. 페이지를 실제로 넘기는 것처럼 페이지가 넘어가면 멋지지 않을까? 제스처를 통해서 확대와 축소를 할 수 있으면 멋지잖을까? 산업디자인 팀의 종이에 그 아이디어가 다 있기는 했죠. 그러다가 커가 센서 쪽 사람들과 하드웨어 쪽 사람들에게 멀티터치에 대해 얘기하고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몇 주일 지난 후에, 커와 그의 팀이 만들어낸 프로토타입을 보고 우리 모두 충격에 빠졌으니까요. 구글 지도를 확대/축소하고 회전도 해 봤습니다.

RUBINSTEIN: 정말 멋졌죠. 하지만 충분치는 않았어요. 그러니까 아이패드 이전에 아이폰용 기술로도 그랬습니다.



GRIGNON: 그때 맥 소프트웨어 책임자였던 스콧 포스탈(Scott Forstall)이 프로젝트에 대한 풍문을 듣고는, 휴대폰에 맥오에스 넣기를 강하게 원했습니다.

ROGERS: 아이폰은 이러한 공백 상태에서 만들어졌죠. 소프트웨어 팀과 하드웨어 팀은 서로 얘기도 안 했습니다. 제 초기 임무 중 하나가, 실제로 전화를 걸 수 있는 아이폰용 소프트웨어 시스템을 진짜가 아니라 병행 개발용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GRIGNON: 우리는 그것을 "스컹크폰(skankphone)"이라 불렀죠. 60명 가령 되는 토니의 하드웨어 팀 중에서도 실제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볼 수 있는 권한은 저와 그 외 3명 뿐이었습니다.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보기 전에 별도의 법적 문서에 서명을 해야 했고, 결재권자는 스티브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실제 비밀 목록을 갖고 있는 포스탈에게 가야했죠. 그러면 포스탈은 "아무에게도, 부인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말하죠.

브로디(ABIGAIL SARAH BRODY)는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이너였다.

파이널컷 프로와 로직 프로, 애퍼처 등 Pro Apps라 부르는 프로그램을 위한 디자인 언어를 새로이 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2005년 쯤이었나, 4층으로 올라와 보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4층이 간부들 층이거든요. 저는 제가 할 작업이 휴대폰 작업일지도 몰랐습니다. 그저 "멀티터치용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만들어 보게"가 끝이었으니까요.

SATZGER: 최초의 아이폰을 개발할 때, 우리는 화면 크기와 홈 버튼을 둘러싸고 개발을 했었어요.

BRODY: 원형 프로토타입을 갖고 치수를 어림잡았죠. 손가락 크기의 이미지를 렌더링해서 엄지 손가락이 화면에 어떻게 닿을지를 알아 봤어요. 그리고 나서는 메뉴같은 것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각형 버튼이 있는 화면을 만들어냈습니다.

SATZGER: 모든 모델에 놓인 스크린샷이 있었는데, UI에 대해 우리가 아는 전부였어요. 무슨 일이 진행되어가는지 조니는 알고 있었겠지만, 우리 산업디자인 그룹 대다수는 제스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기본 기능과 비주얼 보이스메일 등 아이폰에서 나오는 모든 놀라운 일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몰랐습니다.

가나트라(NITIN GANATRA)는 iOS 애플리케이션과 엔지니어링 부장이었으며 현재는 Jawbone의 상무이사이다.

애플이 뉴튼에 터치 입력을 넣어서 판매한 적이 있었지만 업계가 비웃었었죠. 팀원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스콧은 룩앤필의 세세한 사항까지 대단히 집중했었어요. 앱을 하나 열면, 그 앱이 바로바로 떠야 했죠. 엄지 손가락을 위아래로 움직이면, 스크롤링 또한 지연 현상 없이 손가락 움직임을 따라야 했습니다.

브릭터(LOREN BRICHTER)는 그래픽 엔지니어였으며, 후에 Twitter 앱, Tweetie를 개발한다. Tweetie는 iOS의 밀어 당기기 제스처를 소개했다.

UI가 정말 놀라웠습니다. 3-D 그래픽에 초당 60 프레임이었으니까요. 이전까지는 존재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ROGERS: 2007년 1월 맥월드에서 소개하기 전에 화장실에 앉아 아이폰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거 정말 혁명이더군요. 화장실에서 이메일을 확인했으니까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장비라는 점을 깨달은 순간이었습니다.



BRODY: 스티브는 클라운피시(clown-fish) 배경화면에 푸른 바다 아네모네를 보여 줬었죠. 제가 사용했던 샘플 이미지였습니다. 검정색 UI, 광택(glossiness), 큰 숫자 등도 있었죠. 나중에 스티브가 홀에 있길래, "제 디자인같아 보이던데요?"했더니 아니라고 하더군요. 애플에 있을 때 제일 즐거웠던 기억은 아이폰 선보이는 날이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팀이 마무리를 하기는 했고 제 기여가 0.1% 정도였겠지만, 그래도 제가 아이폰에 도움을 줬다는 데에 뭔가 있긴 하죠.

애플의 제품 계획 주기는 제한적인 사용 사례를 놓고 가차 없이 집중하는 것 외에 마술이 없다.
데디우(HORACE DEDIU)는 Nokia의 분석가였으며 현재는 Asymco의 창업자이자 독립 분석가이다.

첫 아이폰이 선을 보인 다음 날, 노키아 카페테리아에 가서 사람들에게 한 번 물어 봤었죠. "뭐, 별 거 없더만"의 분위기였습니다. 애플이 디자인에서 한 타협은 전설적이었죠. 복사-붙이기와 멀티태스킹, 심지어 처음에는 앱도 없었습니다. 애플은 우리가 멋진 폰을 하나 만들었다는 것 뿐이라 말했어요. 다른 모든 기업들이 스마트에 집중하고 있던 와중에, 애플은 사랑받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아이폰은 애플 매출액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최대의 성공작이 된다. 그 이후로 아이브 팀은 아이폰의 후속작을 연이어 선보였고, 애플은 원래 멀티터치용 장비로 염두에 뒀던 태블릿 컴퓨터로 되돌아갔다.




GANATRA: 태블릿 얘기는 2008년 후반에 처음 들었습니다. "그냥 커다란 아이포드 터치로 생각해 봐"라고 스티브가 얘기했었죠. 우리가 그리 많은 일을 할 필요가 없었던 사안을 스티브가 주장했다? 보기 드문 순간이었습니다.

맥니스(MATT MACINNIS)는 마케팅 관리자였다.

애플의 제품 계획 주기는 제한적인 사용 사례를 놓고 가차 없이 집중하는 것 외에 마술이 없습니다. 각 제품의 첫 번째 버전의 역할은 정말 좁죠, 그리고 밀폐형입니다. 아이패드에서는 양면에 독을 놓자는 아이디어가 있었어요. 집에서 어디에 놓는지에 따라 다르게 움직이는 것이죠. 침대맡에 옆으로 뉘어 두면 알람 시계가 되지만, 부엌에 세워 놓으면 조리서가 되는 식입니다. 이 아이디어는 잘렸습니다.

SEGALL: 애플 II 시절ㅇ는 "most personal computer"라는 태그가 있었습니다만, 이 아이패드야말로 제일 개인적인 컴퓨터입니다. 진짜에요. 손을 대고, 목소리에 반응하니까요.



2010 "It started as this green felt thing"


아이패드가 나온 이듬해에는 주요 신제품 소개가 없었고, 삼성과 구글 같은 경쟁사들이 자신들의 터치스크린 휴대폰과 태블릿으로 애플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뭔가 바뀌는 느낌은, 2010년 9월, 아이폰용 게임을 위한 소셜네트워킹 앱, Game Center로 설명될 것이다. 잡스가 선호하는, 스큐어몰피즘(skeuomorphism)이라는 극한까지 추구하는 세밀한 3D 비주얼 메타포의 사례가 바로 Game Center였다.



GANATRA: Game Center는 사실 거칠었죠. 스큐어몰피즘이 중앙에 내세워져 있다는 점이 실책이었습니다. 이 녹색 질감으로 시작해서, 진정한 메타포로 남기 위해 허우적댔었죠.



윌슨(JASON WILSON)은 수석 UI 디자이너였으며, 현재는 Pinterest의 수석 제품 디자이너이다.

포스탈은 뒤에 숨은 센스를 이해하지 않은 채로 스티브의 디자인 취향을 받아들였습니다. 포스탈 휘하에서 디자인을 참을 수 없어서 제가 애플을 떠났죠.

GANATRA: 포스탈이 스큐어몰피즘을 심하게 추진했다는 사실을 보도한 언론이 아주 많습니다만, 진상은 다릅니다. 스티브가 그랬어요. 나무와 가죽을 보고는, 달력 앱과 책꽂이 앱에 무엇이 제일 잘 어울리는지 보기 위해서 재료별로 검토를 확장 시켜서 했었습니다.

ZWERNER: 애플에서 제일 어려운 일은 고용입니다.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죠. "애플에 와서 타이포그래피 한 줄이 달린 하얀색 배경에 사진을 놓는 것만 몇 년이고 할 수 있나요?" 애플에 있는 분들과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능력을 정말 존경합니다. 스티브는 이런 종류의 일을 인생의 과업으로 여겼죠. 모두를 한데 묶는 세심한 관리가 없다면 얼마나 오래갈까가 의문입니다.



2011년 잡스의 서거 이후, 애플의 소프트웨어 문제는 더 악화되어가는 것으로 보였다. 멋진 비주얼을 갖췄지만 올바른 위치 지정 문제가 불거지는 바람에 Apple Maps에 대해 CEO 팀 쿡은 공개사과까지 해야했다. 이 문제는 2012년 10월, 포스탈의 사임으로 번졌다고 하며, 애플 소프트웨어에 대해 거의 결정권이 없었던 아이브가 포스탈의 역할을 받아서, iOS의 야심찬 디자인 개수를 시작했다.



MACINNIS: 아마존과 페이스북, 구글의 핵심은 데이터입니다. 그들 사업은 데이터 관리에 대한 기술적인 이해로 시작되죠. 그런데 애플은 데이터 다룰 줄을 몰라요.

포스탈 휘하에서 디자인을 참을 수 없어서 제가 애플을 떠났죠.
WILSON: 소프트웨어 질이 떨어지고, 웹서비스는 항상 실패였습니다. 구글이 치고 올라오고 있고요.



지난 6월, WWDC에서 애플은 아이브의 현대적인 iOS 7을 발표한다. iOS 7은 새로운 제스처-기반의 인터랙션 모델을 포함하며, 이때 미래적인 맥-프로도 여기에 포함됐다. 아마도 제일 중요할지 모를 자랑스러움도 같이 들어 있었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부 수석 부사장인 크레이그 페더리기(Craig Federighi)은 이런 말을 했다. "녹색 느낌에서 완전히 벗어났죠." 애플 마케팅 수석인 필 실러는 이렇게 말했다. "혁신이 끝났다고요?"



SEGALL: 스티브에게는 놀라움이 언제나 중요했습니다. 새 맥 프로에서 받은 느낌도 그랬어요. G4 큐브 생각이 나더군요. 애플이 아마 다 구겨 넣었겠지만, 맥 프로를 열어 보면 터빈 팬과 냉각 코어가 정말 애플답습니다. 데스크톱 컴퓨터를 그렇게 다시 디자인할 자가 애플 말고 지구상에 누가 있겠어요? 혁신자로서의 애플에 대해 좋은 느낌이 들더군요.

Apple - iOS 7 - Introduction. - YouTube

BRICHTER: iOS 7을 세세히 뒤집어 봤는데, 애플이 정말 큰 일을 해냈더군요. 겉치장만이 아니었습니다. 물리학을 더한 UI 프레임웍을 구현해냈어요. 정말 자연스럽습니다. 실제 현상을 그대로 재현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보면 이 역시 스큐어몰피즘입니다. 예전에는 시각 디자인에서였다면, 지금은 인터랙션 디자인으로 스큐어몰피즘이 옮겨갔어요.



2013 "Apple branches, grafted onto new trees"

BRODY 현재 비밀리에 새로운 기업 창업 작업중

WWDC를 온라인으로 봤습니다. 정말 열심히 하더군요. 하지만 스티브 없는 애플은 제게 있어서 다른 장소입니다. 좋은 곳이기는 하지만 달라요. 그래도 토니 퍼델 같은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해내는 점이 정말 기쁩니다. 애플이 가지를 내어서 새로운 나무가 자라나는 듯 하거든요.

FADELL, 현재 Nest의 CEO

애플에서 우리는 언제나 질문했습니다. 우리 말고는 누가 혁명을 일으키겠어요? 비디오 카메라와 리모콘을 얘기했었죠. 우리가 논의했던 것 중에 제일 미친 것은 Google Glass같은 기기였습니다. "우리가 만약 얼굴 가리개같은 것을 만들어서 극장같은 기분을 주면 어떨까?"였어요. 그래서 프로토타입을 여러 벌 만들었지만, 이미 하던 일로 워낙에 대성공을 거뒀기에, 다른 일을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MACINNIS, 현재 전자책 출판사인 Inkling의 창업자

제가 애플에서 배운 것이 바로 시각 디자인과 인터랙션 디자인입니다. 마케팅과 브랜딩 역시 아주 많이 배웠죠. 애플을 떠난 이후로 배웠던 점도 있습니다. 비밀주의는 작동하지 않는다에요. 복제하려 애쓰는 모습은 얼간이로 비쳐질 뿐입니다.

KUEMPEL, 전직 인턴이자, 현재 $11,000 짜리 커피메이커 제조업체인 Blossom Coffee의 창업자

아이패드 SIM-카드 배출기 작업을 했었습니다. 정말 멋진 클릭으로 이뤄지죠. 여러분도 모두 환영 받습니다. 애플에 있을 기회는 분명 존재하지만, 제품 디자인이 아니라 SIM 배출기를 디자인하는 것이어서 애플을 떠나기로 했었죠. 아이패드가 태블릿 시장을 창출해낸 것처럼, 업계 하나를 만들 전체적인 제품을 만들어내고 싶습니다.



DAVE MORIN, 전직 애플 마케팅 관리자이자 현재는 모바일 소셜-네트워킹 앱인 Path의 공동창업자

뭣보다도 품질 추구야말로 애플로부터 배운 교훈이고, Path를 만들게 한 힘입니다.

PHIL LIBIN, 노트-필기 앱인 Evernote의 CEO

아름다운 디자인의 제품은 언제나 있었습니다만 그 제품들은 매우 고가인데다가 실제로 소유할 사람들도 매우 소수였죠. 애플은 고급 디자인을 주류로 만든 최초의 회사입니다. 세상에다가 취향을 가르쳐 줬어요.

HAWKINS:

500년 후에도 알려져 있을 우리 세대의 인물은 스티브 잡스 뿐일 겁니다.

GADI AMIT, NewDealDesign의 창업자(Lytro 카메라와 활동 측정기인 Fitbit의 디자이너)

1990년 정도에 저는 이스라엘에 있었어요. Scitex라는 회사였는데, 정말 많은 시간을 샌프란시스코의 Frog Design에서 보냈습니다. 제 옆에 있던 사람이 스티브 잡스의 넥스트 작업을 하고 있더군요. 그의 책상에 똑같은 마우스가 3개 놓여 있었는데 저는 도저히 그 차이를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었더니 모르겠냐면서, 마우스의 밑면을 가리키더군요. 하나는 두께가 1 밀리미터, 다른 하나는 1.5 밀리미터였습니다.

나머지는 2 밀리미터였죠. 그제서야 차이가 보이더군요. 디자인 디테일에 대한 저의 관점이 바뀐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예 캘리포니아로 이주했죠.



바로 애플의 기여이다. 마지막 밀리미터까지 쫓는 완벽주의의 종교적인, 그리고 아름다운 추구이다. 애플은 디자인 세상을 완전히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Additional reporting by Austin Carr, Skylar Bergl, and Mark Wilson.

[Illustrations by Benoit Challand | Amanda Mocci | Flickr user Andreas Dantz]

A version of this article appeared in the October 2013 issue of Fast Company magazine.

An Oral History Of Apple Design: 1992–2013 | Co.Design | business + design

위민복님이 번역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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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2

park님의 댓글

추억은 방울방울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kontiki님의 댓글

아..길고도 흥미진진한 글이었습니다. 마지막이 mm 부분이 참 와닿네요. ^^

전체 2,464 건 - 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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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조니아이브, 승진이 갖는 의미

애플 조니아이브, 승진이 갖는 의미 이글은 애플 제품의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는 조나단 아이브(Jonathan Ive)와 그의 주변 인사에 대한 해외 기사를 번역한 내용 입니다. On Jony Ive’s Promotion to Chief 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