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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은여우의 선언.

본문

은여우의 선언.

총을 든 나는 무릎께까지 빠지는 눈의 무게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전진 하고 있었다. 도대체가 40도가 넘을 것 같은, 상당히 가파른 산을 꿩 몇 마리가 푸드득! 거린다고 올라올 일이 애당초 아니었다. 묘하게도 하늘을 보고 수직으로 자라, 산허리의 각도를 정확히 알려주는 성긴 나무들의 작은 가지를 잡고, 잠깐씩 오른
팔에 힘을 주며 굉장히 느리고 고통스러운 전진을 하고 있었다.

꿩들이 단체로 돌아 버리지 않고서야 날개를 가진 그들이 이산에 머물러 있을 리도 만무 하다는 생각이었으나, 도대체 멈출 수가 없었다. “후우욱~” 하고 휘파람을 부는 듯한 거친 숨소리가, 고요한 산중의 적막을 깨고 있었고, 더 이상 들고 있는 총의 차가운 무게를 느낄 수도 없었다.

“어이 김사장. 오랜만이네…”
“어 형님”
“그래 잘 지내구?”
“네? 사냥을 가자고요?”

총을 새로 사서 온몸이 근질거리는 선배님의 권유보다는 ‘나 어쩌지요?’ 하고 darkslateblue의 염색을 새로 한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채 고개를 숙이며 의논이 아닌 ‘통보’를 하던, 당신의 아름다운 입술에서 조심스레 배어져 나온 푸른빛의 우울한 단어들로 머리가 어지러운 탓에,

“그러지요 뭐. 그래요.”
하고 Jeep을 몰아 강원도의 어느 이름도 모르는 산골짝으로 눈을 헤치고 달렸다. 어차피 최종 목적지는 ‘꿩’이었고 그런 것들이 어딘가에 있으리라는 판단은 약간의 육감과 운 이었다 세상 모든 일들이 다 그렇듯이…

겨우 정말 기적처럼 산마루에 올랐지만, 그곳에서 탁 트인 시야와 더 넘어 동해의 시리도록 푸른 잉크 빛 바다를 본 것은 아니었다. 좀더 먼 곳, 검은 산까지는 아직도 제법 거리가 있었고, 8도 가량의 평평한 개활지가 눈앞에 갑자기 펼쳐져 있었다. 사막의 모래언덕같이 부드러운 라인의 능선들이, ghostwhite빛 눈을 덮고 있었다. 눈으로 된 능선의 윗부분들은 하나같이 겨울의 태양으로 빛을 부챗살처럼 내뿜고 있었고, 눈가루들이 바람을 타고 날고 있었다. 아직 아무도 이곳까지 발을 내딛은 적이 없었다는 것을, 웬일인지 확신하게 될 만큼 고적한 곳이었다. ‘군부대도 없는 곳이고, 인가도 없는 이곳에서 지금 내가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

햇볕이 겨울답지 않게 너무 세게 내리쬐고 있었다. 안경의 탓일까? 조그만 무지개들이 눈가에 어른 거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쨍~ 소리가 날것 같이 깊은 분위기의 하늘이 나뭇가지들에게 둘러 싸여 있었다. 동그란 나무들의 우물에 빠져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곳엔 문명이란 것이, 아직도 전혀 쓸모없는 것이고, 그런 따위의 쓸데없는 것이 발 닿지 않은 곳이었고, 문득 당신의 장난꾸러기 같은 입가의 미소가 떠오른 것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와아! 이런 곳에 단 둘만 있다면 좋겠다."
“무얼 먹고 살지요?”
“그래 이곳에서 감자도 캐고 뭐 그렇게 살구 당신은 목 조각이라도 하면 안 될까?”

판에 박히고 천박하고 쓸데없는 가출소년 같은 그런 어설픈 생각이라는,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모를 두뇌의 비웃음이 느껴지고 순간 모멸감이 들었다. ‘한쪽 뇌로도 잘 살 수 있다지? 뇌의 가운데를 연결하는 신경을 잘라두면 오른쪽 눈이 본 것을 왼쪽 뇌는 인지하지 못한다지?’ 문자 그대로 손발이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에 관한, 그런 기록을 남긴 자들이 어떤 실험을 하였는지를 생각하곤, 조금 섬뜩함을 느꼈다.

“그래요 나는 당신 없이 하루도 살 수 없어요. 하지만 나는 ‘내가 속한 세계’를 울릴 수도 없어요.”

라는 두 마디의 말이 그렇게도 복잡하고 어려운 말인지, 나는 이미 일주일을 그 속에 숨어있는 뜻을 캐느라 지쳐 버리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이 속한 세계’를 울리고, 나와 함께 하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당신이 속한 세계’를 울리지 않고, 나 없는 죽음을 택할 것인가? 두 가지 다 말도 안 되는 명제라서 나로서는 단순하고 분명한 말이었음에도 도저히 진의를 파악하기가 어려웠고, 언제나 과거, 현재, 미래까지 나의 소유물, 가장 진귀하고 때로 나 자신보다도 더 귀중한 보물이라고 여기어 왔고, 언제나 흔쾌히, ‘그러지 않길 바래?’ 하고 핀잔을 주어 마지않았던, 당신이 보여준 뜻밖의 눈물에 담긴 당혹함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사랑 한대더니… 나를 죽도록… 하루도 안보면 안 되도록, 그렇게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짐작도 못 할 거라고 하더니…’

아무래도 당신을 잃을 것만 같았고, 그렇다면 나는 당신을 기억하는 부분의 뇌를 잘라내고 싶었다. 혹시 다른 기억을 조금 더 잃거나, 손발이 떨리거나 하는 부작용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부담이 있었지만, 그 당시 그런 건 별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돌아서 내려갈까? 아니면 조금 올라가 볼까?’
발아래를 스치고 지나는 눈가루들은 사막의 모래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가끔 얼굴언저리를 따갑게 툭툭 치고 지나가는 품이, 굴러다니노라 조그만 얼음 알갱이가 된 것 같았고, 그렇게 새로운 힘을 얻은 것이 만족스러웠는지 철부지들처럼 주변 모든 것들을 툭툭 건드리며, 시비를 걸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때였다.
조금 떨어져 산허리의 그늘진 곳에서 무엇인가 움직임이 있다고 느낀 것은 눈동자는 밝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고, 시선에서 벗어난 곳이라 분명히 시각보다 빠른 내 몸 안의 어떤 것이 그것을 감지한 것이다. 잠시 또 다른 작은 무지개들이 눈앞을 떠다니고, 초점을 빨리 잡지 못하는 나 자신의 움직임이 나무늘보처럼 느껴졌다. 수초간의 답답함이 지나고, 오른손으로 총의 개머리판을 엉거주춤 힘을 주며 잡았다. 드디어 제 기능을 찾은 눈이 내게 빠른 말로 알려준 것은,
< 은.여.우.다.! >

뾰족하고 길게 뻗은 콧잔등의 끝에는 까만 코가 방울처럼 달려 있었고, 생각보다는 큰 두 귀가 머리위로 삼각형으로 세워져 있었다. 또 다른 가로누운 긴 삼각형의 두 눈 위에는 작은 흰색의 동전만한 눈두덩이 있었고 목에서부터 등을 타고 윤기 나는 은회색의 부드러운 털이 덮여 있었다. 몸통만큼이나 큰 꼬리가 아래로 향해 있었지만 땅에 끌리도록 닿지는 닿았다. 전체적으로 부드럽지만 네발의 발목 부분에는 털도, 여유도 없어 보이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그런 야생의 내음이 물씬한, 털 속의 숨겨진 딱딱한 근육이 보이는 듯한 몸매였다.

그대로 고개를 빳빳하게 든 채, 산허리에서 내려오다가 나를 본 듯, 오른쪽 앞발이 살짝 들린 채 나를 향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감시 팽팽한 긴장이 목 언저리를 타고 흐르며, 나는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머리 속을 통하여 울리는 것을 들었다. 천천히 손을 움직여 총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구 총구를 들어 올릴 때쯤 갑자기 ‘그만둬!’ 하는 제지의 소리를 들었고, 그것 또한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알 수 없는 두뇌의 명령이었다. 상당히 근엄한 음성이라서 총을 더 조준해야 하는 것인지 어쩐지,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잠시 은여우를 바라보았다. 그 놈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고, 두 귀를 한번씩 교대로 털었다. 수묵화를 빼어 닮은 산허리쯤에, 아주 자세히 보지 않으면 은회색의 털빛으로 발견하지도 못할 은여우가 깊은 눈으로,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고, 일생을 통하여 그런 시간에, 그런 장소에 절대로 있지 않을, 제로에 수렴하는 확률을 가진 잿빛 도시의 사내가 은여우를, 어쩌지도 못한 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가루를 실은 바람이 발밑을 스쳤고, 바짓가랑이가 조금 펄럭였을 때, 그곳 은여우가 혀끝으로 코를 한번 핥고 난 뒤 무엇인가 움찔거리듯 말을 건네려 하는 것을 나는 알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어느 쪽인지의 뇌가 감지하였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당신이 잡으려고 하는 ‘목적’이지요. 그렇게 나를 총으로 쏘아 잡아 모피를 얻고 싶은가요? 난 당신이 속한 세계의 것이 아니에요. 그걸 모르시겠어요? 나는 나만의 세계가 있고 결코 당신에게 속하지 않아요. 나는 당신의 아이를 낳을 수도, 저녁에 된장찌개를 끓여 놓고 당신을 기다릴 수 없어요.”

“나의 손은 바위와 숲을 헤치기 위하여 이렇게 단단하지요. 나는 추위를 막기 위하여 이런 포근하고 아름다운 털을 가지게 된 것 뿐이라고요.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만난 당신과 나의 시간들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알 수 있기를 바래요. 당신은 내게, 절대적인 어떤 의미가 되기를 바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순 없어요. 적어도 당신이 나를 어떤 식으로든 원한다면 그 욕망이 있는 한, 당신은 절대적으로 내겐 절대적이지 않은 존재예요.”

“이건 당신이 원한 일이고, 나는 당신의 심장위에 서있는 한 마리의 은여우죠. 나는 당신을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에요.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당신과 나는 다른 세계에 속한다는 것을 그래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온 산이 쩌렁거리도록 은여우가 내게 ‘선언’하는 것을 들은 것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어느 쪽 뇌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총을 든 손이 후들거리는 것을 느꼈고, 은여우는 하얀 눈이 무겁게 매달린 소나무 가지 사이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 버렸다. 내가 서 있던 곳은 다만 새까만 발자욱의 비현실로 남았다.

잠시 후, 구르듯 산을 내려온 나는 산 아래 나를 기다리는 burlywood의 엷은 노란색 Jeep과 일행을 만났고, 그들은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를 구워 먹고 있었다.


은여우의 눈동자를 바라본 기억으로                도곡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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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04-02-26 08:4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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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4

에리카님의 댓글

잡으려 하는것은
그 어떤것도 잡을 수 없다...
잡으려 하면 할수록....

김명기님의 댓글

김명기님의 댓글

음... 은여우가 선언한 것에 대하여 다들...
남자들의 좌절? ^~^

여백님의 댓글

은여우(목적)를 만났을 때
은여우를 너무도 잘알아 버렸다는...

은여우가 말해주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은여우를 가질 수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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