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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7월의 일요일아침.

본문

7월의 일요일아침.

어제 앤더슨을 만났다. 그는 결혼을 하였고, 조금 더 살이 찌고, 자신의 닉네임을 딴 바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 대학생으로 터번스 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순진한 미소의 사람 좋은 그 총각 앤더슨과 뜨거운 정종을 나누던 한밤의 이야기는, 이미 압구정동의 수많은 발자국 속으로 스며들어가 저녁 무렵 강 건너 편의 먼 풍경처럼 아스라한 흑백사진이 되어 버렸다.

그를 만나자 참 오랫동안 묻혀져 있던 일들이 다시 어제 일처럼 진한 향기를 지닌 채 공간에 남아 있다. 네온 블루의 유리창을 통하여 바라보는 비 내리는 거리처럼, 손가락 끝에서 올라오는 담배 연기에는 아직 아물지 않은 것들이 선명하고 우울하게 머물러 있다.

“어? 형 오셨어요?”
“음.”
“이렇게 일찍, 웬일이세요?”
“여자친구가 이 근처로 이사 왔어.”
“그래요? 언제?”
“오늘 아침에.”
“와아 그래요? 이제 자주 뵐 수 있겠네요.”
“그렇겠지.”
“그런데 왜 혼자세요?”
“음, 뭘 좀 사가지고 올 거야.”

싱싱한 햇살이 방금 구워 오븐에서 내놓은 따듯한 빵처럼 바의 창을 통하여 마루바닥에 노랗게 번지고 있었다. 미세한 먼지가 천천히 7월의 일요일 오전11시를 떠돌고 있었다.

“창을 좀 열지. 아직 덥지 않은데.”
“그럴게요.”
“뭐 좀 드릴까요?”
“버드 아이스 하나 줘.”

앤더슨이 창을 열자, 광림 교회 쪽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 왔다. 바쁘지 않은 걸음걸이의 차량들이 도로 턱을 넘느라 잠깐씩 출렁거렸고, 목욕용 비닐 백을 든 여인이 간편한 옷차림으로 지나간다. 화장을 하지 않은 두 볼이 붉게 물들어 있다.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여인의 나비같이 가벼운 발걸음을 따라 거리로 시선을 옮긴다. 그리고 골목 끝에 천천히 당신이 나타난다. 나를 보았나보다. 잠깐 멈추어 두 손을 높이 들고 흔든다. 바람이 가득 든 분홍색 풍선 같은 실루엣이다. 나도 손을 들어 몇 번 흔들어 준다.

조금 더 빠른 걸음이 되어 당신은 다가온다. 은색 승용차가 천천히 지나다 속도를 늦추고 마침내 멈춘다. 당신도 걸음을 멈춘다. 다시 자동차가 지나고 그 비어있는 골목길로 당신은 나를 향하여 분명한 의지를 지니고 다가온다. 당신의 눈동자는 햇살처럼 반짝이고 머리카락은 조금씩 팔랑인다. 맑은 바람이 불어온다. 천천히 버드 병을 들고 한 모금 맥주를 들이킨다. 7월이라는 우주가 목을 넘어서 내 몸의 중심으로 이동한다.

비스듬하게 경사진 주차장에 대놓은, 뚜껑을 열어놓은 Jeep의 뒷좌석에 뭔가 종이봉투 하나를 올려놓는다. 이제 당신은 나로부터 3미터 까지 다가와 있다. 나는 창을 활짝 연 2층의 바에서 당신을 내려다보고 당신은 다시 한번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잠깐 뛰어오르고 포도송이 같은 미소를 보낸다.

“뭐예요? 혼자 마시기예요?”
“음 앤더슨이 안마시면 죽인대.”
“어? 형!”
“말도 안 되는 소리! 흥... 미워라.”

차량사이가 좁은지 당신은 옆걸음으로 주차장을 빠져 나온다. 분홍색 티셔츠와 하얀 7부 면바지의 허리 사이로 뽀얗게 배꼽이 살짝 드러난다. 그리고 이내 건물의 현관으로 빨려 들어간다. 바의 끝에 있는 계단으로부터 조그맣게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행복이 다가오는 소리. 돌아보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망설이지 않는, 단단한 믿음을 지닌 사랑이 다가오는 소리. Jack Daniel's의 검고 커다란 포스터가 붙어있는 나무문을 통해 들려오는 소리. 지금도 눈만 감으면 다가오는 7월의 말갛게 빛나는 일요일 아침이 내게 달려오는 소리.

문이 열리고 당신은 가늘고 긴 팔을 잘록한 허리에 올리고 잠깐 멈추어, 15도쯤 곁으로 얼굴을 돌리고 예쁘게 흘겨본다. 그러나 2초쯤이다. 당신은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달려온다. 나는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선다. 당신은 으스러지게 나를 안는다. 조그맣고 생명력 넘치는 몸이다. 당신이 기쁨에 넘치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신의 심장이 고동을 치는 것을 느낀다. 당신의 머리카락에서 초여름의 싱그러움이 향기가 되어 머문다.

“많이 기다렸지요? 크로와상을 좀 샀어요.”
“아니, 즐거웠어. 기다림이 이렇게 즐거운 것인지는 미처 몰랐군.”

당신의 입술에 입맞춤을 한다. 도톰하고 단단한 입술이다. 달콤한 맛이 난다. 어쩌면 이렇게 모든 것이 적당한 입술일까?

“난 아무 것도 못 봤어요.”
컵을 닦던 앤더슨이 너스레를 떨고, 손을 잡고 놓지 않은 채로 당신은 내 곁에 앉는다. 조금도 그리고 잠시도 멀어져 있을 수 없는 당신의 마음이 마주 잡은 손바닥을 통하여 움직여 온다.

앤더슨을 만나고 그런 것들이 생각났다. 이미 해묵은 추억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남아있었다.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당신이 그립지 않은 척 하기는 도대체 얼마나 오래 해야만 익숙해지는 것일까? 과연 익숙해지기나 하는 것일까?

오늘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고 한다. 그래 그렇구나. 모든 것이 얼어붙은 겨울의 한가운데서 당신 없는 겨울을 나고 있다. 때로 견딜 수 없는 것도 견디어야 한다. 그런 것도 인생이다. Miles Davis를 듣고 있다. 오전 내내 듣는다. 겨울은 아직 그 중심에서 멈추어 있다.


강하마을에 머무는 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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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2-26 08:4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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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5

여백님의 댓글

한여름의 풋풋한 향기가 물씬 납니다.
^,.^

黑虎님의 댓글

난 겨울이 좋다눼~~~~~
여름 시로...
글구 본문중에
입맞춤....
이 단어땜에 우울해져쏘........
크흑..........

iceberg님의 댓글

어느 작가가 한 얘기중에도 그런 말이 있었어요. 인생이란 견뎌야 할 때가 있는 법이라고...
견딜 수 없는것도 견디어야 한다는 말에 공감!

김명기님의 댓글

정말 견길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하는 떄가 있더군요...

김명기님의 댓글

여백 님이 여름 향기를 맡았다고 하시니 이글은 대성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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