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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해안의 쇼핑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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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의 쇼핑센터

나는 1989년도, 새로 짓기 전의 초라한 내 오두막에서 글을 쓰고 있었다. 내 작은 오두막의 창으로 환하게 빛나는 옅은 에메랄드 빛 바다가 찰랑이고 있었다. 나는 눈이 부셔서 제대로 낡은 타자기를 누를 수가 없었다.

잠깐 바다의 수면이 높아지는 듯 하더니, 파도가 내 오두막으로 밀려와 발목까지 잠기고 말았다.

나는 두렵지 않았다.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발밑을 내려다보니 파도의 포말이 내 맨발등 위에서 차라락! 소리를 내며 부서지고 있었다.

나는

‘당신이 떠난 뒤에 몇 번의 절망을 더 맛보았지만,’

이라고 쓰고는 작은 오두막을 나왔다. 햇살이 아주 따사로운 해변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몇 명의 관광객인 듯한 사람들이 바다를 감시하는 빈 전망대 아래를 지나고 있었고, 갈매기들이 바람을 타고 해안의 하늘을 떠다니고 있었다.

잠깐 해변에 서서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썰물인지 건너편까지의 바다가 무릎정도의 깊이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잉크처럼 파란 바닷물을 건너 샌디브라운으로 빛나는 건너편 해안에 도착했다.

해안에는 커다란 쇼핑센터가 있었다. 나는 막대한 크기의 유리문 앞에 섰다. 유리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개점 전인지, 사람이 없었다. 물건들이 쌓여 있는 좁은 복도를 지나 수많은 여성복들이 걸려 있는 쇼 케이스 앞으로 지나갈 때, 나는 선풍기를 넘어가야만 했다.

전깃줄이 발에 걸려 선풍기가 넘어졌다.

“어머.”

어디선가 도우미 복장을 한 여인이 달려 나왔다. 그런데 그 여인은 전깃줄을 잡아 당겨 나를 쓰러지게 만들었다.

“너무한데요?”
“미안해요. 난로가 넘어지지 않게 한다는 것이.”
“미안하지만, 이건 선풍기로군요.”
“어머 그러네요. 내가 왜 난로라고 했을까? 이런 바보 같은 실수를 하다니.”

여인은 겸연쩍은 듯이 웃었다.

나도 미소를 지으며 또 어딘가 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갑자기 뒤에서 여인이 좆아 오는 발걸음 소리가 났다.

“잠깐만요.”

“여기 전화기를 떨어뜨리셨어요.”

그러나 받고 보니 수첩이다.

“이건 수첩인데요?”
“앗 오늘은 정말 바보 같으네. 왜 이런 실수를 두 번씩이나...”

그녀는 잔잔한 바다의 파도처럼 어깨를 출렁거리며 웃었다. 보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잠시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특징 없는 보통여인의 눈이었다. 서너 명의 형제들 속에서 중간정도의 학교 성적으로 눈에 띠지 않게 자라온 수수한 보통 여인.

그러나 유니폼에 가려진 마른 체형의 몸매는 내게 한 발 가까이 다가왔다.

"이렇게 바보 같은 실수를 연발한 적은 없어요. 그런데 유쾌하네요. 나중에 커피라도 한 잔 하겠어요?"

그녀는 내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전화번호를 내밀었고, 나는 그녀의 번호를 물론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쇼핑센터의 뒷문으로 나와서 어느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아담한 연립주택 현관 앞에서 그녀를 만났다.

"오랜만이죠?"
"그럴 리가 방금 우리는 쇼핑센터 안에서 보았는데."
"아니에요. 우리는 분명히 오랜만이에요."

그제 서야 나는 그녀가 쇼핑센터에서 만났던 여자인 동시에, 오래전 어느 바의 호스티스로 일하고 있었던 여인이었던 것을 알았다. 쇼핑센터에서 만났던 여인은 기억나지 않는 여인이고, 호스티스였던 여자는 분명히 알고 있는 여인이었다. 절대로 동일인 일 수 없었지만, 어쩐지 나의 의식은 '두 사람이 동일인이다.' 로 굳어졌다.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간단히 받아들인 것이다.

"그 때는 미안했어."
"아니요. 내가 더 미안했죠."

1999년의 출장 때, 그녀는 나를 따라 일본에 간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곳에서 돌아오지 않기를 소망했다.

"우리 이곳에서 살아요. 이대로. 우리가게는 2차를 가거나 손님과 개인적으로 교제할 수 없는 것 알고 있지요? 하지만 가게 최고의 여인인 나를 이렇게 데리고 왔으니 가게에서도 눈치를 채고 있을 거예요. 나, 이래 뵈도 음대를 나왔어요. 뭐라도 하면 둘이서 못살게 없을 것 같아요. 우리 돌아가지 말고 여기서 살아요."

"바보 같은 소리."

나는 그렇게 말했다. 너를 사랑할 수는 있어도 너와 함께 살 수는 없어. 그렇게도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침대 머리에 흩어 진 몇 올의 머리카락을 집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오랜만에 다시 들른 그녀의 가게에서 마담이 미끌미끌한 눈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함께 일본에 다녀오셨다구요?"
"아 그건..."
"죄송하지만 그 애가 벌써 다 말했어요. 그리고 이제 여긴 출근하지 않아요. 그리고 규칙은 규칙이니까, 사장님도 이젠 여기 오시는 걸 삼가 해주셨으면 해요. 물장사 제대로 하려면 나름대로 지켜야 할 것들이 있거든요, 여하튼 실망이네요."

잠시 현관 앞에서 지난 시간 속을 거닐고 있던 우리는, 어느새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커피를 끓였다.

"블루 마운틴. 늘 이거셨지요?"
"음. 그렇긴 하지만..."

그녀가 나의 이런 세세한 기호까지 알리는 없는데, 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든 순간 그녀의 얼굴은 내가 동일인으로 인식했던, 쇼핑센터의 도우미로 돌아와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혼란스럽지 않았다. 나는 푸른색의 야광 빛이 나는 대형 수족관의 중간쯤에 멈추어 있는 열대어처럼 평온했다.

"중산층 가정의 중간쯤에 낀 평범한 여자. 맞아요. 보신대로 그런 삶이 바로 저예요."

‘내가 그런 말을 그녀에게 했던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로군.’

"그래서 그쪽을 불러 세운 거예요. 내 삶에 흥미 있는 일이라고는 전혀 없어요. 매장에서 일부러 섹시한 속옷 같은 것을 훔쳐서 입고 나오기까지 해도, 전혀 재미있지 않아요. 나는 이렇게 쇼핑센터에서 청춘을 다 보내고 언젠가는 또 중산층 가정을 만들고 중간쯤 살아갈 아이들을 만들고 늙어가겠지요. 아아 정말 싫어! 누가 내 삶을 이따위로 따분하게 계획해 두었담."

그녀는 유니폼을 벗고 눈부신 나신을 보여주었다. 숨이 멎을 것처럼 희고 아름다운 몸이었다. 그리고 언더헤어만 겨우 가릴 정도로 조그만 가리비 모양의 섹시한 속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그 몸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러실 거예요. 오오사카에서의 밤은 더 할 수 없이 행복했어요. 나는 아직도 류이치 사카모토를 들으면 당신이 떠올라요. 절대로 잊을 수는 없을 거예요. 그리고 오늘 당신과 나에겐 치명적인 기억을 다시 새기는 밤이 될 거예요."

물론 나는 전혀 그녀를 떠올리지 못한다. 따스한 손길이 나를 안았다. 내 허리를 깊이 안고 있는 그녀의 포옹은 놀랍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그녀에게서 재스민 향기가 느껴질 때.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내게서 부드럽게 밀어냈다.

"더 이상은 상처를 줄 수 없어. 나는 이미 너의 애원을 거절한 적이 있지."
"호오 그런 진부한 거절의 말씀이라니. 웬 석기시대 순애보? 당신이 나를 가진 적이 있다구요? 나를 자세히 봐요. 찬찬히 보라구요."

나는 그녀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갑자기 뿌연 안개가 서린 것처럼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지? 나는 눈을 비비고 다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이런, 그녀의 얼굴은 내가 생각하는 모든 여인의 얼굴로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그것도 슬롯머신의 표시 창처럼 계속하여 변하고 있었고, 잠시 멈추는 듯하다가 내가 순간적으로 떠올린 다른 여인의 얼굴로 또 돌아가고 있었다. 그 얼굴에서는 작은 바람마저 불어오고 있다. 그래도 나는 그녀에게 미안했다. 그녀가 그 어떤 얼굴로 변한다고 해도 나는 그녀와 함께 할 수 없다. 마음속에서 촛불처럼 희미하게 떠오른 영상은 그런 것이었다.

"미안해 나는 그만 가봐야겠어. 쓰다가 만 글이 있어."

나는 황급히 돌아서며 그녀의 얼굴이 변하기를 멈추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얼굴을 보지 않았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그 얼굴은 내가 살아서 다시 보기를 바라지 않는 얼굴이었다. 때로 추억은 화상보다도 더 지독하다. 이미 그 정도는 알고 있기에 다시 그 얼굴을 보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방을 나왔고, 200개의 계단을 내려가야만 했다. 어찌나 아찔한 급경사인지 난간을 잘 붙잡아야 했다. 어쩌면 200개가 더 되는 계단이었는지도 모른다. 에스컬레이터처럼 계단이 올라온다는 느낌이 들었고, 실제로 계단을 다 내려갔을 때엔 쇼핑센터의 1층 현관 앞이었다.

현관의 자동문이 다시 열렸다. 눈앞에 햇살을 가득 담은 따스하고 기분 좋은 바다가 환하게 펼쳐져 있었다. 바다의 짠 내음이 후욱! 코로 밀려들었다. 세상 근심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듯한 사람들이, 느린 시간을 보내며 해안을 산책하고 있었다. 콜리 종의 개가 긴 코로 갈색 공을 밀고 있었고, 갈매기들이 스낵을 손에 든 사람 주변에 새 하얗게 몰려들고 있었다.

나는 솜사탕 하나를 샀다. 솜사탕 파는 사람은 내 오피스텔 지하의 세탁소 주인이었다. 그 사람은 평판이 좋지 않았다. 세탁물도 깨끗하지 않았었고, 솜사탕 맛도 미원을 한 수저 가득 입에 넣은 것처럼 이상했다. 나는 솜사탕을 바람에 실어 하늘로 날려 보냈다.

'어쩌면 갈매기들이 내게 원한을 가질지도 모르겠군.'

나는 해안에 서서 건너편 내 오두막을 바라보았다. 바다는 가라 앉아 오두막과 해안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얕아진 바다를 걸어 오두막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마다 커다란 파도가 장마철의 강물처럼 눈앞을 지나갔다. 바람이 세차지고 파도의 머리 위가 포말이 되어 부서지기 시작했다. 온몸에 위험의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일순간 바람이 잦아들었다. 나는 그 틈을 타서 다시 전속력으로 오두막을 향해 뛰었다. 뒤통수에 바싹 붙어서 파도가 달려오는 소리가 나고, 머리카락이 곤두서며 파도의 강력한 흡인력이 느껴졌다. 바다 냄새가 한층 짙어졌다. 나는 가까스로 오두막에 도착했다.

그리고 워드프로세서의 파란 바탕 화면에 흰 글씨로 이렇게 썼다.

‘절망의 끝엔 또 뭐가 있을까? 새로운 절망쯤이 버티고 있지는 않을까?’


자작나무 껍질에 새기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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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2-26 08:4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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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7

여백님의 댓글

쟈스민.....
이국의 연초록냄새가 상상의 나래를 자극하네여~!

절망의 끝의 새로운 절망...
포말과 뒤섞여 밀려드는 파도 처럼
끊임없이 또 끊임없이..

하지만 크게보면 밀물이 있고 썰물이 있고...
바닥까지 드러낸 해안가를 보다가도
물고기까지 따라오는 가득찬 해안가도 있고..

빠져나가면 언젠가 다시차는..

누군가 제게 말했져.. 해안이 그려진 그림을 가르키며...
"다 빠져나가고 다 버려지면 다시 차는 것만 남았다고"

파도처럼 밀려오는 연속된 절망도 다~빠져나가버리면
희망만 가득하다는...

-,.-"

alt님의 댓글

절망의 끝이니까 또 절망은 없겠죠...

TheAnd님의 댓글

절망의 끝은 언제나 희망입니다.
희망이고 환희고 행복이고...............
불행을 겪어보지 않으면 행복을 모르듯 절망도 그러하지 않을까요?
어둠이 있어 빛이 한층 눈부시듯 언제나 좋은것만 있어선 곤란할것같네요.
"모두를 버리면 모두를 얻을 수 있다"란 말이 있습니다.
"버려야 얻을수 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 물론 제가 하는 말입니다 -..ㅡ;;
ㅋㅋㅋㅋ
-____________- =3=3=3

김명기님의 댓글

누군가 바다가 아름다운 것은 우리가 언젠가는 떠나야 하기 때문이라고 명언(?)을 남기더군요. ^~^

김명기님의 댓글

민주주의를 피를 먹고 자라고 사람의 사랑이라는 것은 늘 절망을 먹고 피는 꽃은 아닌지...

김명기님의 댓글

벌써 다른 멋진 위인들이 다 떠든 이야기 같은데? ^~^

黑虎님의 댓글

희망...
희망....
절망.....
이 역시 머리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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