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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은 왜 1984년이 안 됐을까? (스티븐 시놉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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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984년은 왜 1984년이 안 됐을까? (스티븐 시놉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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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rning by Shipping

Why was 1984 not really like “1984″, for me

scottytalkstomac.jpg?w=300&h=159내 기억에 1984년은 Van Halen의 앨범, The Right Stuff의 해이자 대학교 두 번째 학기의 해이기도 했다. 또한 컴퓨팅과 함께 깨우침의 시간이었다. 1월 25일은 애플 매킨토시의 30주년이며, 매킨토시의 수퍼볼 광고는 1월 22일에 있었다. 매킨토시의 첫 선이 내 인생 경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이야기를 나누겠다.

좀 제멋대로이기는 하지만, 배경 설명을 좀 해야겠다. 당시 수퍼볼 광고와 매킨토시에 대해 다들 어느 정도는 향수를 느끼고 있으리라고 본다.

High School, pre-Macintosh

그때는 모두들 Dungeons and Dragons 게임을 하던 때인데, Pong이 아닌, 내가 했던 최초의 컴퓨터 게임기는 Atari 800이었다. 제일 친한 친구가 갖고 있었던 덕분이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애플 ][를 갖춘 학교가 아니었다. 올란도 주 교외 지역까지는 애플이 들어오지 않았었다. 친구들은 Talking Heads와 Police, B-52s를 듣느라 바뻤지만, 필자는 비록 8K BASIC 카트리지만 있지 테이프 저장 장치는 없었지만 Atari 상에서 프로그래밍을 스스로 익히느라 바빴다. 매번 컴퓨터를 사용할 때마다 시작을 다시 해야 했다. (아마도) 그 어린 나이 때에도 코딩을 계속 하면 직업으로 삼을 수 있겠다 싶었고, 우리 가족의 사업을 위해 유용한 프로그램을 작성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여러 다른 주에서 구매를 했을 때 전체 매출액을 치면 테이블에 있는 세율을 찾아서, 주별로 판매세를 계산해주는 계산하는 프로그램 같은 종류였다.

Atari 800

기업가였지만 기술에 능하지는 않았던 아버지는 바로 우리 가족 사업의 회계 처리를 자동화 시켜줄 컴퓨터 구매를 고려하셨었다. 그래서 1981년, 아버지께서는 일단 Osborne I을 상당한 가격(당시 $1,795였고, 지금 물가로 치면 $4,600 정도다)에 구매하셨다. 8 bit CPU에 두 개의 90K 플로피 드라이브, 그리고 아마 필요한 전부일 사업용 프로그램 다섯 가지가 들어 있었다.

나도 여기에 뛰어들었다. 재고와 고객 관리, 주문에 사용할 프로그램을 베이식으로 작성했고, 아버지는 베이식이 수능시험과 대입시험 중간 정도 되리라 여겼었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훨씬 어려웠다. (수능시험도 어려웠다.) 그때 "데이터베이스"인지 뭔지 하는 dBase II를 발견했다. 그 진정한 의미는 나중에서야 알게 됐지만 말이다. 그래서 단기간에 우리집 사업을 위해 문자에 기반을 둔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다.

Osborne Ad

대학을 가기 위해 Osborne I에 300b 모뎀을 붙였고, 덕분에 업데이트와 버그 수정도 할 수 있었다. (그 나쁜 물류 회사 놈들이 대금교환 출하를 중간고사 기간에 바꿨었다. 하드-코딩을 했거늘!)

College Fall Semester

Osborne I과 나의 Royal typewriter/daisy wheel/parallel port “편지 품질”의 프린터를 들고 따사로운 이타카로 출발했다.

워낙에 컴퓨터 전문인 Cornell 대학은 우리에게 “BITNET 전자메일 계정”을 줬고, 내 계정은 TGUJ@CORNELLA.EDU었다. 친숙하고 기억하기 좋고 유용하지만, 뭘 할지는 아무도 몰랐던 것이 저 계정이었다. 단 내 이메일 ID를 펀치카드 상에 찍는 것이 최고였다. 엘리트 Osborne 사용자로서 VT100 터미널로 메인프레임에 들어가야 했을 때를 느끼게 해줬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저 계정을 사용했던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Computer Services 일자리를 지원할 때였다.

punchcard

Student Terminal Operator (STO)라는 컴퓨터 서비스 그룹 일자리를 구했는데, 4시간씩 두 곳을 맡았었다. 하나는 Upson Hall의 "터미널 실"이다. 10여 대의 VT100 터미널로 가득찬, 전산학과 컴퓨터실이었다. 다른 하나는 금요일 밤(오타 아니다)에, SGI 그래픽 웍스테이션과 IBM PC XT, 애플 Lisa, 펀치카드 머신과 같은 주변기기, "키가 큰 고속 프린터"가 들어 있는 고급 "연구실"이었다. 이 연구실에서 난 리본 교환을 맡았고, 그때문에 마스크와 플라스틱 긴 장갑을 끼워야 했다.

1403

금요일 밤은 WordPerfect를 사용하는 IBM/MS-DOS PC 몇 대에 숙제를 하기 위해 온 사람들 뿐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용용으로는 몇 대의 PC만 있을 뿐이었고, 난 시간 대부분을 논문 쓰는 대학원생들과 같이 보냈다. 우선적인 임무는 워드퍼펙트 사용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키보드 탬플릿을 추척하기였다. 이 경험 때문에 나중에 맥이 훨씬 더 좋아졌었다.

전산과에서 난 Xerox Star와 Alto를 Sun WorkstationsmicroVAX 미니와 함께 쓸 기회가 있었다. 컴퓨터에 흥미 있다면 정말 축복과 같은 환경이었다. 당시 컴퓨터 세상은 온갖 툴과 플랫폼이 이루는 불협화음의 세계였으며, 거대한 캠퍼스가 진정한 컴퓨팅 파워를 바로바로 활용하던 시대는 아니었다. 코넬 대학교에는 여러가지 플랫폼이 혼재돼 있었지만, 다양한 자동차가 주차돼 있던 것만큼으니 자연스러웠었다. 컴퓨터 시설에서는 특히 장점으로 비쳐졌다.

xerox-star-interface2

그런데 새로 나온 특급 비밀 컴퓨터가 이 모든 상황을 바꾸려 하고 있었다.

한 정체불명의 회사에서 나온 새로운 컴퓨터를 쓰게 됐는데, 일이 끝난 어느 날 밤, 동료 오퍼레이터들이 날 끌고 Upson Hall의 한 잠겨진 지하 방으로 갔다. 거기에서 새 컴퓨터를 보고 사용할 수 있었다. 실제 체인이 달린 벽에 걸려 있는 한 나무 박스였다. 여기에 Xerox와 Sun 웍스테이션처럼 마우스가 달려 있었다. 또한 웍스테이션처럼 비트맵 화면이었고, Xerox처럼 "인터페이스"를 지니고 있었다. 상단에서 메뉴바가 떨어져 내렸고, 파일과 폴더의 데스크톱이 놓여 있었다. 이 컴퓨터는 기숙사에서 듣던 냉장고 소음보다도 훨씬 더 조용하고 작았다.

우리 모두 사랑한 페인팅 프로그램 사용하기가 정말 쉬워서 마술같기도 했다. "워드 프로세서"도 있었는데, 특수 키와 과부화가 된 데스크톱 메타포를 사용한 제록스보다 훨씬 더 사용이 쉬웠다. 조금 사용하다보니 충돌이 많이 일어났지만 시동이 꽤 빨랐고, 우리가 하고 느꼈던 점 대부분을 비교해 보면 이제까지 사용했던 다른 컴퓨터와 달랐다.

기말고사가 다가오자, 이 컴퓨터를 갖고 노는 시간이 정말 재미있어졌다. 컴퓨팅 선택이 바다처럼 넓은 가운데, 내가 경험했던 것 중 이 컴퓨터가 절대적으로 제일 재미 있었다. 아마 벽에 체인으로 걸려 있어서 더 그랬을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정말 울러 퍼지는 뭔가가 있었다. 정확히 뭔가 기억나는 것은, 그저 감정의 울림 뿐이었다.

다양하고 복잡한 컴퓨팅 세계에 있던 나는 그 다음 6 주일간 세상이 바뀌리라는 사실에 대해 아직 준비가 안 돼 있었다.

Superbowl

애플 광고를 생각하려면, 1984년 처음이 어땠는지부터 생각해야 한다. 오웰 식의 말이 여기 저기 많았다. 물론 대학교 신입생들이 동물농장(Animal Farm)과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1984의 디스토피아적인 메시지를 비교하고 대조해 놓았었다. 그 대상으로 매번 냉전을 언급했던 것은 당연하겠다. 우리나라는 불황에서 벗어나는 중이었고, 낙관주의가 가득 차 있었다.

이와 동시에 IBM이 도처에 깔리고 있었다. IBM은 컴퓨팅와 동의어였다. 당연히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 광고도 근사했지만 일반인들이 가진 컴퓨팅 이미지는 바로 IBM의 메인프레임(CORNELLA가 이타카 공항에 놓여 있었다)이었다. IBM은 말그대로 혁신의 기둥이었으며(몇 년 후에 IBM 과학자들이 제논(Xenon) 원자에 IBM을 새겨 놓기도 했었다), 그때문에 IBM에 대한 불신도 가득했다. IBM은 코넬 동료인 커트 보네것(Kurt Vonnegut)이 만든 무소불위의 거대 기업
RAMJAC을 방불케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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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애플의 광고가 나왔다는 말이다. 이 광고는 정말 마음을 사로잡았었다(수퍼볼 자체보다도 훨씬 더 그랬다). 내 눈 앞에서 이 모두가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시간이 걸릴 정도였다.

Apple

애플은 새 컴퓨터를 소개합니다.
IBM PC와는 대단히 많이 다를 겁니다.
세상은 더 이상 1984년처럼 되지 않을 겁니다.

제일 중요한 점은, 몇 주일 앞서서 갖고 놀았던 그 컴퓨터가 사실 애플 매킨토시였다는 점이었다.

난 너무 기뻐서 터미널실에 들어가 동료들에게 새로 나온 애플 매킨토시 얘기를 했다.

Returning

Upson의 터미널실에 들어갔는데, 이미 맥이 VT100을 대체하기 시작했었다. 처음에는 두 세 대 들어 오더니, 아예 터미널 접근이 맥의 에뮬레이션으로 이주했었다. (사실상 맥이 터미널보다 저렴하다는 루머가 맞았던 모양이다!)

128k Mac

내 금요일 밤 일도 바뀌었다. 맥이 몇 대 연구실에 추가됐고, 대기 순번까지 만들어야 할 정도였다. 곧 충실한 일꾼들만이 PC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 외로운 컴퓨터실에 새로운 종류의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도 목격했다.

MacpaintWP

이력을 준비하는 Arts & Sciences 선배들이 이력서를 ImageWriter로 출력하는 광경도 봤다. (이미지라이터로의 출력은 리본 교환보다 훨씬 더 쉬웠다. 난 매일 밤마다 리본을 몇 번씩 교환해야 했었다.) 그리스어로 된 남녀 학생회 사람들이 와서 사인 만들어달라 부탁하기도 했었다. 학생들은 MacPaint의 픽셀아트와 비트로 자신의 재능을 발견했으며, 캠퍼스 전체가 하룻밤 사이에 페이지마다 서체 한계를 테스트하는 이미지라이터 출력에 매달릴 정도로 바뀌었다.

Imagewriter

sample_printout_macintosh_dot_matrix-printer1

하지만 인정해야 할 사항이 한 가지 있다. 오리지널 MacWrite에서 메모리 커럽션 버그 때문에 잃은 문서 복구를 시도하면서 정말 시간을 많이 썼었다. 그래서 우리들 오퍼레이터 모두 모든 경우에 맞춰서 훌륭한 문제해결 가이드를 만들어냈었다. (가령 문서당 서체는 4개 까지만, 문서 양은 5 페이지까지만, 너무 많은 리턴(carriage returns) 금지 등이다.) 우리는 업데이트를 열망하며 기다렸고, 업데이트가 나왔을 때 학생들은 자기들 MacWrite 업데이트를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서곤 했다. (당시는 인터넷 다운로드가 없었다.)

매킨토시는 급속히 캠퍼스를 휩쓸었다. 애플의 천재적이었던 대학교 캠페인 덕분인지 코넬은 물론 여러 다른 대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Osborne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나 스스로도 매킨토시를 더 많이 사용했다.

macwriteLarge

Completing College

그 이후로도 매킨토시가 캠퍼스 내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했었다. 후배들은 아예 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맥을 사들고 들어 왔었다. 연구 자금도 맥 구입에 사용됐고, 책상 어디를 봐도 매킨토시가 놓여 있었다. 심지어 맥만 팔고 서비스하는 업소가 캠퍼스 바로 옆에 생기기도 했었다. 사람들은 이제 마우스를 사용하여 사무실 가구를 바꿀 때 레이아웃을 정했다. 컴퓨터실은 로컬 프린터와 마우스 지원이 가능해지도록 조정됐고, 캠퍼스 스토어는 플로피 디스크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플로피 디스크는 곧 수업 대부분의 필수품이 됐다.

문서 작성은 이제 타자기에서 제한적인 WordPerfect로, 그리고 특히 그 해 봄 기말 시험 때 거의 누구나 사용하던 MacWrite로 옮겨 갔다. 나중에는 훨씬 더 강력하여 표준이 된 마이크로소프트 맥용 워드로 옮겨 갔지만 말이다.

Mac Word 1.0
호텔경영학과 학생들은 거의 즉각 마이크로소프트 맥용 엑셀을 사용하고 있었다.

via pingdom and Mike Koss

화학과는 과 전체가 매킨토시로 이주했다. 소프트웨어가 주된 원인이었다. 매킨토시 이전에는 화학 저널에 올릴 논문을 준비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설명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원고 준비를 위해 분자도를 그릴 정규직 직원을 채용하기도 했었다.) ChemDraw는 정말 화학자들에게 중요한 소프트웨어였다. (내 전공 절반이 화학이었다.)

매킨토시의 고향을 발견한 곳이 바로 화학과였고, 교수들도 정말 협조적이었다. (특히 클라디(Jon Clardy) 교수가 그러했다.) 연구 그룹은 참신하게도 마우스가 달린 MS-DOS PC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갖고 있었으며, 맥에는 외장 하드 드라이브도 달려 있었다.

난 나의 맥 소프트웨어 작성을 위해 MacApp과 LightSpeed Pascal 같은 툴을 갖췄었다. 이전 까지 나의 프로그래밍은 PC(그리고 메인프레임과 유닉스) 위주였다. 여름방학 두 번을 Martin Marietta(dBase 프로그래머였던 래틀립(Wayne Ratliff)이 일했던 곳!)에서 인턴으로 지내며 맥의 드래그앤드롭이나 MacWrite, 맥 엑셀처럼 사용하기 쉬운 MS-DOS 워드 프로그램을 해킹했었다. 그래서 매킨토시 호출인 K&R과 C, INT 21h 배우기가 즐거웠다.

thinks-lightspeed-pascal-10-2

나의 첫 프로젝트는 거대한 포트란 프로그램(Molecular Mechanics)을 맥으로 포팅 시키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이 포팅은 작동을 했다. (아마 지금도 놀라실 텐데, 포트란 컴파일러가 존재했었다.) 맥이 문서 작성용만이 아니라 작업용으로도 쓰일 수 있음을 연구소에 확인 시켜 준 셈이었다. 그 다음에는 맥에서 시각화가 가능하도록 작업을 시작했다. 그래픽 프로그래밍은 모두가 다 새로웠다. 객체지향 이벤트 루프 프로그래밍은 수수께끼와 같았고, INT 21h나 stdio와 비교하게 만들었었다.

하지만 해킹을 몇 번 하다 보니(화학과에서는 정말 신선한 시도였다) 전체가 다 확실해졌다. 사용했던 이전 시스템과는 달리 맥의 우아함은 특별했다. 쓰면 쓸수록 맥은 합리적으로 느껴졌다. 나 스스로를 유닉스 시스템 프로그래밍에 투신했기 때문에 그동안 나는 알아야 할 트릭 안에 묻혀 있었다. 매킨토시는 시스템처럼 느껴졌다. 더 배우면 배울수록 새로운 뭔가가 나와도 어떻게 돌아갈지 추측할 수가 있었다. 프로그램의 버그는 버그라기보다는 내가 이해하지 못 해서 생긴 것이라는 느낌이었다.

Macintosh Revealed

증거가 있다. 졸업반 봄 학기 때 난 10여 가지 변수를 사용하여 주기율표를 시각화 시키는 프로그램을 작성할 수 있었다. 원소의 주기(periodicity)를 탐색하는 용도였다. X-Y 그래프와 막대 그래프, 텍스트 표의 루틴을 작성했으며, 주인공은 한 가지 속성(보통은 전자의 친화성을 나타내는 주기율을 그리는 데에 쓰인다)을 보여주는 2.5 차원의 주기율표였다. 컴퓨터 그래픽에서는 SGI를 사용하는 친구들에게 아주 많이 질문을 해야 했었다! 그래도 난 새 OS(그때 이것이 아마 다섯 번째 아니면 여섯 번째)로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프로그래밍(이건 처음이었다)도 할 수 있었다.

바로 MacMendeleev의 탄생이었다.

MacMendeleev

시스템에 놀라워 하면서 힘도 받는 그런 특별한 순간을 우리들 긱 모두 갖고 있다.벽에 걸린 나무 상자에서 캠퍼스 전체로 퍼진 것도 마술 같았는데 말이다. 바로 그 시스템에서 1987년의 그날, 난 시스템 상에서 내 코드로 투시도를 렌더링할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의 마지막 보고서도 내게는 예술 작품이었다.

가능한 것이 프로그래밍만은 아니었다. 매킨토시의 우아함과 학습성, 매킨토시가 대학교 내에서 거둔 유명세만도 아니었다. 이 모두였다. 나 스스로의 잠재력을 깨닫게 해 준 툴의 총합이 매킨토시였다. 화학 점수만은 끔찍했지만, 매킨토시로 화학과에 기여할 수 있었으며, 아마 실제 화학은 잘 못 해도 뭔가 할 수 있음을 교수 한 둘에게는 보여줬을 것이다(게다가 내 보고서가 정말 놀라워 보였다!).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화학도 좀 배울 수 있었고 말이다.

내 교육 경력을 쌓을 때 가장 중요한 일부가 된 매킨토시와 함께 이룬 일이다.

아마 "마음의 자전거"를 사용하여 만들어냈으니, 매킨토시에게는 영원히 감사해 할 일이다.

What came next

대학원에서는 컴퓨팅이 더 다양해졌다. SmallTalk가 연구 플랫폼이기는 했지만 우리는 DEC VMS를 사용했기 때문에,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의 뉘앙스를 공부하면서 매킨토시 OS의 우아함(MacApp과 그 이전의 Lisa)이 더 확실해졌다.

과제와 표 그리기, 책상에서 microVAX 접속을 모두 매킨토시 II로 했다. 심지어 매킨토시에서 마이크로소프트 워드로 이력서를 작성하여 마이크로소프트에 보내기도 했었다. MacMendeleev의 작업 덕분에 ACM 컨퍼런스에서 수상으로 받은 마이크로소프트 워드였다.

마이크로소프트에 들어갔을 때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맥 엑셀 작업한 사람들도 탁자에 체인으로 묶인 상자의 맥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대학교에서 사용하던 매킨토시용 프로그램을 작성한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 즉, 내가 속해 있던 마이크로소프트 "Apps" 팀의 많은 이들이 맥과 유닉스의 혼합 환경에서 자라났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당시 Xenix를 사용했다.) 우리 모두 MS-DOS와 윈도로의 개종자 이상이었던 것이다. (윈도 3.0은 내가 마이크로소프트에 들어갔을 때 개발중이었다.)

우리의 집단적인 경험이 각자 작어바고 있던 제품에 스며들어갔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심지어 위키피디어도 MacApp이 MFC(내가 처음 기여했던 제품이다)에 끼친 영향을 문서화 시켜 놓을 정도다. MFC, Visual Basic과 같은 툴을 통해 윈도 또한 수많은 젊은 프로그래머들을, 내가 처음 매킨토시를 사용했을 때 느꼈던 충만함을 느끼도록 했을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다시 지금으로 돌아와서, 요새 대학생들이 웹 해킹을 하며 자라났지만 이제는 모바일 플랫폼에 노출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 안 할 수 없다. 웹은 그들에게 일종의 Atari였다. 프로그래밍이 가능하고 이해도 가능하며 재미있다는 점에서다. 아이디어를 갖다가 인터넷에 연결 시켜서 만들어내고, 스스로의 경험을 쌓는다 함은, 내가 처음부터 매킨토시 프로그래밍을 했던 느낌과 같다. 시스템에 대한 이해와 디자인의 우아함, 힘의 조합은 기술과 움직임을 분리 시켜준다.

나로서는 나의 학습과 기술, 결국 자존심까지 매킨토시가 기여해 줬다. 매킨토시는 분명 나의 인생 커리어를 바꿔 놓았다. 분명 1984년은 내게 있어서 1984년처럼 되지 않았다.

Happy Anniversary

그렇다. 물론 나는 PC다. (그리고 당연히 서피스이기도 하다.) 내 직업 인생에 PC만큼 기여한 것은 없다!

–Steven Sinofsky (@stevesi, stevesi@mac.com)

PS: How far have we come? Check out this Computer Chronicles from 1985 where the new Macintosh is discussed.

Why was 1984 not really like “1984″, for me | Learning by Shipping

위민복님이 번역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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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1

김경모님의 댓글

언제나 번역해 주시는 위민복님께 감사드립니다.

잘 읽고나니 느끼는 점은.. 기승전 서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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