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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이대로 나를 잊어주면 좋겠군.

본문

이대로 나를 잊어주면 좋겠군.

새벽비가 그치자, 햇살이 힘있게 달려와서 빨래 건조대의 스테인레스 난간에 매달렸다. 빗방울들은 머금고있던 빛을 내쏜다. 세계는 푸른 쪽으로 많이 기울어진 왕가위 영화의 스틸사진이 되었다. 깨끗하고 우울하다. 그리고 하루는 빨래를 하기에 아주 적당한 오전을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청신한 숲 속의 풍경 바라보기'에 그다지 많은 시간을 소모하지 못한다. 요사이 며칠은 사소한 일에도 많이 신경이 쓰이고, 조금 성마른 상태가 되어있다.

어쩌다 소송 따위를 준비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서로의 오해에 의한 아슬아슬한 자기 주장으로, 미묘한 차이를 지닌 합리적인 의견조정 같은 것이 아니라, 몰상식한 한 인간의 터무니 없는 주장에 의하여 시작 되었다. 그러자니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일일이 답변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신경을 깎아 먹는 일이다.

"그래서 신경이 쓰이는군요."
"참 복두 많지. 그래두 전혀 그런 얼굴이 아닌걸요? 나는 3년이나 소송 중이예요. 신경 쓰지마요. 가끔 법원에 가서 답변하고 뭐 그런식으로 세월이 가는거죠."

그렇군. 내 주위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소송 중에 있었다. 그들은 소송 자체보다도 그런 소모적인 일로 자신의 시간을 갉아내는 것에 대하여 더 낙담하고 있었다.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 일에 끌려다닌다는 것은 정말이지, 지겨운 일이다. 하지만 남들도 대개 그렇게 세월을 보낸다.

게다가 몇 가지 진행 하던 일들이 복잡한 저마다의 사정에서 맴돈다. 지지부진이다. 주변에 내게 신뢰를 주어야 할 몇 몇 사람들도 자신의 일상에 빠져서인지, 제대로 상식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다. 그러니 그들의 말을 믿고 또 다른 약속을 해야 하는 나로써는 상심이 크다.

믿을 수 없는 말을 베이스로 새로운 약속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신경을 거스르는 일인지, 그 상황에 닥쳐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일은 어디까지 진행 되었는지 알 길이 없고, 전화는 잘 되지 않고, 모든 것은 불투명 하다. 아마 일을 이런식으로 진행하는 사람은, 그 보고를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흐트러지는지 돌아보지 않았을 것이다.

예를 들면 파리채는 없는데, 한참 집중하여 글을 쓰는 모니터 위로 날아다니는 파리.

그러다보니 사소한 일에도 조금 격한 심정이 되고는 한다. 할 수 없이 내게로 들어오는 몇 가지 정보의 터널을 막고 대체로 방심하며 살고 있다.

"아이 참, 듣고 있는 거예요?"
"앗! 미안. 방금 뭐라고 했지?"

그런 식의 대화가 흔하다. 대화가 진행되다가 요즘 나를 답답하게 만드는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나는 내부의 심연에 가라앉아 있던 분노가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게 되는 것을 알고있다. 그러므로 불나방처럼, 뜨거운 중심으로 수렴하는 대화에는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벌컥 화를 내는 것도 싫고, 이미 머리 속에서 어느 정도 정리된 일을 다시 끄집어 내서 몇 시간이고 되새기는 일도 싫다. 오후 6시가 되면 업무적인 모든 신경을 책을 덮듯 탁! 소리가 나게 꺼버리고, 느린 Blues 나, 맥주 몇잔. 그리고 나만의 세계에 둥둥 떠다니는 공상 속에 파묻히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자꾸만 내게서 시간을 앗아가려고 한다. 그동안 가진게 시간뿐이라고 말했던 것이 조금 후회가 되기도 한다. 언제까지 이런 식의 소모를 해야할까? 바보는 결국 바보 짓으로 상대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사람을 만나는 일로 생기는 잠재적인 절망이다.

할 수없다. 나는 내게 편리한 격언을 떠올린다.

'피하지 못할 것이라면 즐겨라!'

'맞아 맞아. 피하지 못할 일이라면 즐겨야지.'

나는 서초동의 변호사 사무실에 가기 전 미리 시간을 좀 낸다. 강남역 근처의 회전 초밥집에 들러,

"참치 주세요. 기름이 잔뜩 낀 뱃살부분으로."

라고 주문하고, 그간 숲에서 군침만 흘리던 초밥을 싫컷 먹어둔다. 그리고 젊음으로 넘실거리는 강남역 주변의 뒷길을, 이마에 부드러운 가을 햇살을 받으며 담배를 물고 천천히 지난다. 불쑥불쑥 떠오르는 기억 따위도 마른 낙엽처럼 뒹굴게 버려둔다.

레드망고에 들러 야쿠르트 아이스크림을 하나 주문한다. 주위를 둘러보니 남루한 중년남자는 나 혼자다. 아무렴 어때? 나는 종종걸음으로 건널목을 지나는 거리의 사람들을 2층에서 내려다보며, 복잡한 도심에서 홀로 한가롭게 주중의 오후를 만끽한다. 지금 이 순간, 세계는 나와 상관 없이 흘러간다.

'세상이 이대로 나를 잊어주면 좋겠군.'

그렇게 기원하지만, 그리 오랫 동안 현실과 유리되지는 못한다는 것쯤은 알고있다. 그 또한 할 수없는 일이다.

'좋아. 다음에 또 변호사 사무실에 오게 되면 그땐, 뭘할까?'

나는 2004년 가을의 한가운데 서서 혼자 슬그머니 미소 짓는다.


자작나무 껍질에 새기는 꿈.

www.allbaro.com


ps: 다 좋은데, 서울만 다녀오면 콧구멍이 새카매지는군. 이런건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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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2-26 08:4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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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11

에리카님의 댓글

잊혀짐..
잊어야함...
잊음...
싫음....

영환군님의 댓글

아! 형님 서울 올라오셨나요?
이러언...
참 어제 부탁하신 것은 그분께 보내드렸습니다.

김명기님의 댓글

때로 망각이 100배 더 편리할 수도 있지요.

김명기님의 댓글

음. 어젠 시간이 안맞더군. 금요일 저녁에 인사동에서 모임이 있어. 시간이 되면 얼굴 한 번 보자구. ^~^

iceberg님의 댓글

전 서울에서 태어나 자라고 여기가 좋다기보다 여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정말 나쁜 공기와 형편없는 자동차문화는 구제불능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선진국이 되고 싶다면 자동차문화부터 고쳐져야한다는 것이 저의 소견입니다.
서식지에서는 무례한 자동차들땜에 짜증나는 일은 없겠지요?

김명기님의 댓글

당연히 무례한 자동차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 무레한 것은 참... 도리가 없더군요... ^~^

adam님의 댓글

그래도 조금은 콧구멍이 새카매지는 서울이 그립지 않으신지요? 전혀? ^-^
금요일에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김명기님의 댓글

음.. 인사동에서 보겠네. 오랜만에 회포를 풀어보자구. ^~^

김명기님의 댓글

아 참! 영환군도 시간되면 애기 델구 나오지. ^~^

여백님의 댓글

변호사...
소송

법원....

-,.-"

기름이 잔뜩 낀 참치 뱃살로 법의 때를 벗기다...
소송에 걸려있으시다며 좋은 결과 있으시길...

김명기님의 댓글

정말 싫은 일들이니까, 그저 잘되기만 바래야지요... 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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