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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목로주점.

본문

목로주점.

새벽의 서식지는 서리가 하얗게 대지를 덮은 낙엽의 바다가 됩니다. 벌써 파이프의 물이 얼고, 손가락이 곱아서 자판을 두드리기도 어렵네요. 이곳은 이미 겨울의 문턱입니다.

어제 남한산성 고갯길을 넘다가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은행나무 낙엽의 부드러운 커튼 속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났고 기억은 세월에 묻혀 사라졌지만, 지난 모든 추억들이 낙엽마다 한 장씩 복사 되어 눈앞에 쏟아집니다.

나도 모르게,

‘지금이 또 그때인가?’

하고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의 한 해는 황도(黃道)를 걷고 걸어, 우연히 다시 그 때 그 시간 속에 서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문득 우리가 서 있는 이 곳은 절대로 작년의, 또 그 전 해의 그 곳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행성이 작년과 똑 같은 위치에 있다고 해도, 우리가 속한 태양계는 은하를 돌고 돕니다. 게다가 태양계를 품고 있는 은하역시 또 더 큰 우주를 돌지요. 결국 우리가 발을 딛고 선 이 자리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단 한 번 지나가는 한 장소] 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주의 한 지점을 꾸준히 지나가고 있을 뿐이지, 절대로 같은 공간을 두 번 통과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가을은 작년의 가을도 아니고, 그 전해의 가을도 아닙니다. 전혀 새로운 가을이고 전혀 새로운 장소입니다.

우리가 멈추어 선 이곳은 우리가 백년을 멈추어 있다고 해도 늘 제자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곳을 지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과거에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회상하는 먼 과거들은 이미 새까만 과거 속으로, 어딘가 알지 못할 우주의 공간에 놓아두고 온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과거에 우리가 아무리 멋진 추억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 때로 돌아 갈 수는 없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아무리 기가 막힌 실패를 하였다고 해도 내일 역시 같은 실패를 하진 않습니다. 어제 아무리 납득하기 어려운 이별을 하였다고 해도, 오늘 우리는 전혀 새로운 장소에 서 있는 것입니다. 어제는 지나 간 것이고 오늘은 늘 새로운 것입니다.

어제 부도가 나셨습니까?
어제 사랑으로부터 겨울보다 더 차가운 이별을 선고 받으셨습니까?
어제의 면접시험은 최악이었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모두 과거지사(過去之事)입니다.

하루는 나아가고 하루는 멈춥니다. 또 하루는 보람 없이 손 안에서 부스러지고 또 하루는 고개를 숙인 절망이기도 합니다. 나는 하루와 하루 사이에 머물러 있고 하루는 내게 손을 내밀어 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모두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조화입니다.

내일 어쩌면 다시 모든 것은 손안에서 부스러질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는 하루를 헤치고 나아가야 합니다. 때로 하루에 밀려가는 것만이 아니라, 용감하게 문을 열고 하루를 헤쳐 나가기도 해야지, 공짜로 부여 받은 시간과 운명에 대한 최소한의 갚음이 아닐까요?

오늘은 비가 옵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단 한 번 맞는 비입니다. 어제의 비도 내일의 비도 이 비는 아닙니다. 살아 있으니 맞을 수 있는 비입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하면 김치전 부쳐 먹기에 일 년 중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가 들른 이 목로주점에서 막걸리 한 잔에 실패한 하루를 실어 보내고, 또 다른 아침을 맞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에 단 한 번 밖에 없는 귀중한 순간, 어제의 실패로 조금 더 성숙한 하루를 말입니다.

아직은 유령처럼 희미하게 흔들리며 겨울 언저리에서 머뭇거리는 늦은 가을입니다.


자작나무 껍질에 새기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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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2-26 08:4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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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6

여백님의 댓글

하루는 나아가고 하루는 멈춥니다.
또 하루는 보람 없이 손 안에서 부스러지고 또 하루는 고개를 숙인 절망이기도 합니다.
나는 하루와 하루 사이에 머물러 있고 하루는 내게 손을 내밀어 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모두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조화입니다.

-,.-"
가슴에 와 닿네요...

가을... 자성의 시간을 가져봅니다.

김명기님의 댓글

지금이 아니라면 또 일 년을 기다려야 할 시기지요. 지금 돌아보고 또 돌아보기로 하지요. ^~^

黑虎님의 댓글

돌아보고 또 돌아봐도 알 수 가 없지요...
항상 변화하는 시간들 속에서 뭔가를 놓치고 지나가도
그것은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빠르게 빠르게...
흘러가기만 할뿐이죠...
언젠간 문득 뒤를 돌아보지만
이미 지금까지 와버린 길만큼의 궤적만이 남아있을뿐이지요...
뒤를 돌아보는것도 중요하지만
그 시간만큼 앞을 보고 나아가는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스치는군요...

iceberg님의 댓글

기뻤던 하루도 절망의 하루도 모두 과거지사이기 때문에 내일은 또다른 하루가 되리라 꿈꿀수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듭니다.
이런 계절, 시간이야말로 뒤돌아보기 정말 좋은 때인것 같네요...

김명기님의 댓글

떠밀려 가는 것이 아닌 용기를 가지고 한 발 나아가는 것. 하루는 대략 그정도의 의미를 지니는 것 같습니다.

김명기님의 댓글

요즘 벽초의 임꺽정에 빠져 있습니다. 사는 것이 어찌 이리 곤고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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