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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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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

하늘은 몇 일째, 납덩이를 닮은 우울한 회색이다. 묵직하게 눌린 무채색은, 멀리 산머리에서 저수지를 건너, 자작나무 숲 속 통나무집에 머무는 한 사내의 가슴속까지도 깊숙이 스며들어 스산하다. 눈이 쌓이지 않은 12월은 우주에서 가장 메마른 행성의 근심 어린 표정이다. 

가끔 지나는 거리의 바람결에 크리스마스 캐럴이 섞여있다. 그렇구나. 벌써 그렇게 시간이 흘렀구나. 사람들은 년 말의 고독을 견디지 못하여 시끌벅적한 성탄을 만들었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지나고 성탄절 아침, 제야의 종소리가 들리고 새해의 아침. 고독은 소란한 축제로 덮을 수 없다. 한 겨울, 혼자 눈을 뜨는 아침마다, 고독은 낙엽처럼 흩어져 걷는 발길에 쓸쓸히 채인다.

이런 진공의 시간에는 빠르고 정신없이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캐럴보다, Bing Crosby가 늘어진 테이프처럼 느릿하게 속삭이는 White Christmas 가 제격이다. 무채색의 하늘, 무채색의 거리, 그리고 낡은 흑백영화 속의 캐럴. 꿈이라도 꾸는 듯한 하루다. 

당신과 사랑에 빠져있던 그해 12월. 나는 굉장히 무신경한 남자가 되고 있었다. 년 말이라 늘 바쁜 척 하며, 당신의 기대를 미꾸라지처럼 벗어나곤 했다.
"크리스마스 따위는 아직 미숙한 애들이나 즐기는 거야. 산타? 그런 게 어디 있어?"
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혹여 당신과 거리를 지나다,
"와아, 저 옷 아주 예쁘다. 그렇지 않아요?"
라고 말해도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음 그렇군."
하고 아주 무성의하게 지나가는 투로 대꾸했다. 또,
"저 핸드백 너무 멋지네요."
라고 꿈꾸는 듯이 감탄하며 말해도,
"그저 그래."
라고 마지못해 말하곤, 힐끗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당신은 내가 전세계에서 가장 바쁜 척하는 12월이라, 더 이상 크리스마스니 뭐니 '철없는'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너무나 냉담한 사람을 만나고 있는 당신의 실망은, 조금씩 고운 마음에 그림자가 되어 쌓인다. 나는 더욱 일부러 바쁜 년 말을 보낸다.
 
"응, 오늘 직원들과 망년회야."
수화기 너머로 전화가 우울하게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미안해"
크리스마스 이브, 나는 당신에게 턱도 없는 부탁을 한다. 새로운 프로젝트에 필요하니, 학교 도서관에 가서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 달라고 정중한,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바쁘지만 저녁에 식사라도 같이 하자.'는 제안에 겨우 무마되어 몹시 볼멘 외출을 한다.

전화를 걸어 당신이 외출한 것을 확인하고, 나는 당신의 원룸으로 향한다. 주차장에 도착한 뒤, 그간 당신 몰래 준비해온 은밀한 작전을 펼친다. 고속 터미널 지하상가에서 사온 트리 와 깜박이 전구들, 솜, 여러 가지 색깔의 장식용 종이 박스들을 낑낑거리며 들고 올라가, 당신의 방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다. 은종이 산더미처럼 두 손에 든 짐 속에서 떨어져 계단을 구르며 맑은 소리를 낸다.

물론 디테일에서 당신이 잠깐 이야기했던,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검은 벨벳 수트와, 갤러리아 백화점에서 보았던 GUCCI 핸드백도 잊지 않았다. 혹시라도 물건이 품절 될까봐, 당신이 말한 그 순간, 나는 화장실에 간 것이 아니라, 미리 점원에게 예약하고 다음 날 사 둔 것이다. 짧은 겨울 한나절, 어두컴컴한 당신의 원룸 공간에 멋진 크리스마스 트리와 전구들이 예쁘게 반짝인다.

준비를 마치고 나는 전화를 한다.
"음, 생각보다 일이 늘어지네, 조금 늦을 것 같아. 미안, 먼저 들어가. 몇 시에 들어간다고? 음 5시... OK! 그 시간에 최대한 맞추어 볼게..."

그리고 나는 5시가 되기 조금 전 당신의 전화를 받는다. 전화 속의 당신은 말을 잇지 못한다.
"당신..."
당신의 음성에는 울음이 섞여 있다.
"너무 늦지 마세요..."

늦다니? 물론 나는 당신의 집 근처에서 잠복 근무중이다. 쓸쓸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다음 순간, 당신의 얼굴에 번져간 기쁨을 수화기 속의 떨리는 음성으로 나누어 가진다.
"사랑해. 일찍 들어갈게"
"사랑해요."

당신이 나와 조용하고 벅찬 통화를 마친 뒤, 나는 곧바로 당신 집의 현관문을 연다. 물론 양손에는 장미와 와인을 들고 있다.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당신은 놀라 동그란 눈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키스 라도 해주는게 좋지 않겠어?"
이윽고 창밖에는 흰눈이 내린다. 당신과 나는 포옹한 채, 그대로 한동안 정물이 되어 현관에 멈추어 있다.

이제 다시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매년 크리스마스는 다가오지만, 당신의 동그란 두 눈은 우주의 끝으로 사라졌다.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우울한 과거가 되어 버린 것이다. 믿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지만 사실이다. 사랑할 때엔 꿈도 꾸지 못한 그런 절망적인 사실이다.

이제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나보다 10배 더 짓궂고, 나보다 100배나 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을 지켜주고, 크리스마스를 함께 해준다면 좋겠다고 기원한다. 그것이 당신과는 꿈에서나 함께 하는 완전한 타인인 내가, 당신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일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래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나는 빨려 들것 같던 당신의 눈동자와, Bing Crosby가 늘어진 테이프처럼 느릿하게 속삭이는 White Christmas와, 함께 마주치던 와인 잔의 맑고 높은 소리가 떠오른다. 내년 크리스마스엔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창가에 겨울 바람이 스치는 낮고 메마른 소리가 들린다.


자작나무 껍질에 그리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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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2

김명기님의 댓글

이번 크리스마스 파티에 쓸 음악 CD. 그런대로 재미난 선곡이 되었다. ^~^

학서니님의 댓글

제발 우리 마눌님이 이글을 읽지 않기를... 그래도 물론 싸고 아마존에서 쎄일을 하길래 다이야(4/1C) 귀거리 한세트 안긴 덕분에 이번 클리스마스랑 연말은 무시히 넘어갈것 같네요~ 하지만 이글을 읽는다면... 흠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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