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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홀릭(workah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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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홀릭(workaholic)

년 말에 학사일정 조정 상, 며칠 휴강을 했다. 거기다 년 초 휴일까지 겹치니 일주일가량을 그대로 쉬게 된 것이다. 갑자기 따스한 굴속의 개미가 되었다. 나는 먹고 자고를 반복한다. 아랫배까지 묵직해진 느낌이다. 학교 운동장에서 추위와 싸우며 승마수업을 하던 일이, 백만 년 전의 기억으로 사라진다. 안드레스 세고비아(Andrés Torres Segovia)의 스페인 모음곡들을 들으며 나는 마냥 느긋함과 행복함에 젖어든다.

가 아니다. 하루하루가 슬슬 불안해 오는 것이다. 이렇게 쉬는 동안 뭔가 일에 차질이 오는 것은 아닐까? 수업 시작하는 날 폭설이 오면 어쩌지? 올 해 첫 주는 내내 한파라는데... 하루에도 열 두 번씩 인터넷으로 날씨 정보를 찾아보다 못해, 손에 들고 다니는 아이폰으로 날씨를 찾아 힐끗거리기 일쑤다. ‘경인년 첫눈에 도로 곳곳 거북이 운행.’ 이란다. 여하튼 언론의 호들갑이라니...

집중해서 생각을 하면 당연히 할 일들이 생각난다. 안 해서 그렇지, 일이 없겠는가? 하지만 몸은 움직여지지 않는다. 어쨌든 지금은 휴일이다. 그러니 이런 날까지 알뜰하게 챙겨서 일할 필요는 없을 것도 같다. 해야 할 일 뒤로 미루기까지 겹쳐 불안감은 점점 가중된다. 에라, 뭐라도 하자. 커피를 진하게 한 잔 말아서 손에 들고 책상에 앉는다.

시무식 계획을 짠다. 상장과 수여 순서를 만든다. 아직 작은 회사지만 그럴수록 독수리의 시각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독수리처럼 높이 날려면 참새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머지  않아 중견기업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기준을 1~2년, 아니 그 후에 맞추어 틀을 짜간다. 골머리가 아프다. 기준이라는 것 때문이다. 이 친구는 일은 잘하는데, 지각이 잦다. 저 친구는 확실하게 일하는데 좀 제멋대로다. 이걸 표창하면 지각을 조장하고 제멋대로 하라는 의미가 될까? (왜 세상은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이, 일도 잘하는, 그런 구조가 아닌게냐!)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럴 때는 단순노동이 최고다. 초고를 끝낸 승마교본 II의 교정을 본다. 순서와 번호를 바꾸고, 글자크기를 맞추고, 자료사진을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10년간 승마 수업을 했으니 사진 자료도 만만치 않다. 나도 모르게 카메라 앞에서 V를 하거나, 배를 밀어 넣고 숨을 멈춘 내 승마제자들이 생각난다. 다들 개성만점의 독특한 젊은이들이다. 아하! 맞아 요 녀석 참 똘똘 했는데. 요즘은 뭐하나? 컴퓨터 앞, 교정 중이던 한글 파일 앞에서, 나는 갑자기 몇 년 전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장님, 저는 평생 말을 탈거예요. 말이 너무 예뻐요.
대장님, 남자친구가 속상하게 해요. 주말에 말만 탄다고 투정이에요.(근데 표정은 왜 자랑스럽지?)
대장님, 이번에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왜 아직도 안 오는 게냐?)
대장님, 유학갑니다. 돌아오면 꼭 소주 사드릴게요. (약속은 약속이다.)
대장님, 결혼합니다. 축복해 주세요. 근데 그 아가씨가 아니에요. (아니 이자식이!)
대장님, 제가 여대를 다니지만 소주는 제대로 배웠답니다.(너도 기억하기 싫을 게다.)
대장님, 저 실은 레즈에요. (얼씨구?)

수많은 승마제자들이 내게 수많은 이야기들을 했다. 젊은 그들은 삶의 앙금 같은 고민을 내게 털어 놓았었고, 나는 그들에게 침묵의 등대가 되어 주었다. 그들이 말과 함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는 동안, 나는 승마교관 이전에 그들의 대장님이었다. 아마 이것은 평생토록 변하지 않겠지. 내가 틀리면, 그들이 통과한 가장 강렬한 젊은 한 시절이 통째로 사라질 수도 있다. 그들이 언제고 돌아와 나를 볼 때, 나는 그때도 그들의 기억에 뚜렷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씩씩한 대장님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내게 주어진 의무는 그것이다.

대원들은 말과 함께 하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이제 각자 자기 자리를 잡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을 것이다. 나는 오래전 그들에게 충고한 말이 사실임을 입증하기 위해, 나도 그들 못지않게 열심히 뛰고 있다. 그들이 다시 돌아오면 나는 똑 같이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되물을 것이다.

어떻더냐? 내 말이 맞지?

나는 슬그머니 그리움에 빠져든다. 8만평 깊은 숲속. 하늘이 우물처럼 올려다 보이는 곳이었지만, 혼자서 12필의 말을 돌보았지만, 밤이면 별들만 초롱초롱 나를 내려다보는 이 행성에서 가장 춥고 외로운 유배지였지만,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천둥벌거숭이 이방인으로 담장 밖의 세월을 보냈지만, 그래도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은 아마 그들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일을 멈추지 못하고, 다가오지도 않은 추위와 폭설 소식에 겁쟁이가 된 채, 따스한 굴  속에서 벌벌 떨고 있다. 전형적인 워커홀릭(workaholic) 이다. - 일에 대한 집념이 강하고, 강박관념이 강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나름대로 특이한 시간 개념이 있고, 일 자체가 자존심의 모체가 되므로 오로지 일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며, 휴가나 휴식을 취할 때는 금단현상이 나타난다. 또 일에 대해서는 거절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된다. 이로 인해 소화기 계통의 질병, 고혈압, 위장병, 우울증, 강박증 등 질병이 생기기 쉽다. 알코올이나 약물중독과 마찬가지로 일에 집중하게 되면 벗어나기 힘들어 건강을 해치기 쉬우며, 가족 및 대인관계에서 문제를 일으키기 쉽다. [네이버 백과사전]

그러나 나는 월요일이 되어 다시 운동장에 나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추위와 폭설 속에서도 펄펄 날 것이다. 겨울이 되어 더욱 드세어진 말을 부드럽게 진정시키고, 타고, 달릴 것이다. ‘안전하지 않으면 승마교육도 없다.’ 라는 우리 회사의 모토를 하루에도 몇 번이고 역설할 것이다. 이젠 손에 일이 붙어 능숙해진 우리 교관들. 언론의 호들갑에도 아랑 곳 하지 않고 말과 함께 건강하고 활발한 겨울을 보내는 아이들의 옥타브 높은 외침을 듣고, 빛나는 미소를 볼 것이다. 감기나 몸살마저도 근접하지 못하는 몸의 노동, 육체의 훈련으로 단련 된 중년의 잔소리 위력을 아낌없이 보여야지.

세고비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왼손가락은 현을 짚고 흔들며 바쁘게 지판 위를 움직인다. 이제 그는 Handel의 Sarabande를 연주한다. 새벽공기는 기타 줄에 맞추어 부드럽게 공명한다. 다정한 클래식 기타 소리는 얼굴에 와 닿는 듯하다. 중년 사내는 오른 손에 커피 잔을 들고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겨울의 창가에 선다. 그리고 창에 비친 우울한 얼굴을 바라본다. 수염을 깎아야겠군. 중년의 끝자락으로 걸어가는 그. 워커홀릭인 그. 하지만 그는 여전히 씩씩하다.


송화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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