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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이빨 닦고, 학교에 갔습니다.

본문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이빨 닦고, 학교에 갔습니다.

먼 곳에서 기차가 떠난다. 밤을 뚫고 어두운 대기 중으로 퍼져가는 기적소리를 듣는다. 문득 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작고 낡은 붉은색 페인트가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조그만 굴다리 아래 서있다. 강릉역을 출발한 기차는 곧 이 굴다리를 지날 것이다. 도토리처럼 짧게 깎은 머리와 파란색 세일러복을 입은 7살 여동생과 나는 귀를 막고 기차를 기다린다. 마침내 기차는 굉음을 내며 머리 위를 지나고, 나와 여동생은 눈을 질끈 감는다.

눈을 뜬 것은 기적소리 때문이 아니었다. 침대위의 내 귀를 연 것은 찰박거리는 낙숫물소리. 어제 밤부터 내린 비는 아직 그치지 않고 있다. 나는 오른쪽 눈을 뜬다. 발밑에 다가온 새벽을 살피는데 두 눈을 다 뜰 필요는 없지. 침실이다. 격자 진 침실 창에 드리운 커튼에 비오는 새벽이 머물고 있다. 비가 내리고, 나는 부드럽고 따스한 침대위에 있다. 고양이는 온 몸을 공처럼 말고, 발밑에 누워 앞발을 핥고 있다.

이윽고 나는 왼쪽 눈을 마저 뜬다. 아내가 있다. 아내는 여전히 피곤이 남은 듯, 베게에 깊이 머리를 묻고 있다. 나는 천천히 아내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아내는 몸을 출렁이며 내게 다가온다. 아내는 왼손을 내 허리에 올린다. 새벽, 창밖엔 비. 침실엔 주관적 시선으로 여전히 아름다운 아내와, 행복한 내가 있다. 잠시 세상은 시간을 멈추고 나는 과거와 현실의 기억을 넘나든다.

살그머니 아내의 손을 떼고 몸을 일으킨다. 갑자기 여기저기서 우드득! 소리가 나며 근육들이 비명을 지른다. 이건 현실이다. 오늘 새벽. 내가 침대 위에서 느끼는 행복은, 몸이 치룬 대가다. 나는 지난 수개월간을 걷고, 뛰어다니고, 펄펄 뛰는 500Kg의 말들을 조련하고 타고 혼내고 어르고 달래며 일했다. 오늘 새벽의 한가함은 바로 그 대가다. 다행히 내 몸은 아직 거친 작업을 견디어 낸다. 손목이 시큰거리고, 어깨가 뻐근하고, 종아리 근육이 발작처럼 경련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잘 해내고 있다. 물론 앞으로 몇 년이나 이 거친 일을 내 몸이 버티어 낼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때는 또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겠지. 어쩌면 이런저런 일이 잘 진행되어 그 때쯤 은퇴하고, 좀 더 느긋하게 침대위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나이 들수록 희망은 초등학교 어린이의 일기장처럼, 말랑말랑해지고, 차분해지고, 일상적이 된다.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이빨 닦고, 학교에 갔습니다. 요 녀석! 너 이게 뭐냐? 성의 없이. 손바닥 대라. 철썩.

여전히 젊은 그때의 선생님은 몰랐을 것이다. 분명히 그 단순한 일상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도 몰랐을 것이고, 돌아보면 당시의 자신이 스스로 젊고, 건강하고, 매일 가르칠 아이들이 눈망울을 초롱이며 자신을 기다리던 상황자체가 얼마나 큰 행복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건장한 아빠의 서늘한 눈길과 따스한 엄마의 손길로 지은 밥을 먹으며 학교에 가는 어린이들도 지금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지. 어디 먼 곳 고독 속에서 긴 밤을 지낸 사람들. 다가오지 않은 불편한 미래를 기다리며 뜬 눈으로 밤새운 사람들은,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이빨 닦고, 학교에 갔습니다.’ 라는 짧은 말에 함축 된 행복을 새록새록 되새길 것이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백석 -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中에서

나는 거실로 내려온다. 몇 번이고 이야기 하지만 나는 이 나무 계단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발끝에 닿는 부드러운 목재의 질감이 좋아서 2층의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어느 곳에 살든 나무계단을 만들고 싶다. 거실 밖의 창가에도 비는 내리고 있다. 나는 커피를 끓이고, 진공관 앰프를 켜고, 칸타빌레를 듣는다. 보리케니가 연주하는 첼로협주곡 아디지오 칸타빌레. 아내는 침대위에 잠들어 있고, 비오는 새벽은 창가에 서성인다.

어쩌면 도토리처럼 짧게 깎은 머리와 파란색 세일러복을 입은 7살 여동생과, 귀를 막고 기차를 기다리던 고향 강릉의 그 굴다리가 바로 무지개다리는 아니었을까? 모처럼 완전한 새벽. 나는 행복이라는 무지개다리에 관해 생각한다.


송화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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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3

그까이꺼대충님의 댓글

오랜만에 읽어보는 글이 참 어린시절을 아련하게 떠오르게 하네요.
잔잔한 미소를 머금게 하네요

요샌 정독하기 힘든데 오늘은 다 읽고 갑니다~^^

마음의소리님의 댓글

돈에 쫓겨 일에만 사는 저에게 한번쯤 아무생각없이 뛰놀던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것 같네요!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아치D.님의 댓글

행복이라는거....
개인마다 조금씩 틀릴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본인하기 나름인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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