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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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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집시

나는 Pop 이나 클래식에 대하여 그리 해박하지 못하다. 다행이 남들이, “호오, 제법인데?” 라고 생각하는 곡들을 골라듣고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주변의 진짜로 음악에 대하여 확실하게 꿰고 있는 사람들과 나름대로 편식이 심한 귀 덕분이다.

가끔 이 세상 마지막 독립행성인 산 속의 오두막에 처박혀, 며칠이고 한쪽 벽면에 가득한 L.P.를 차례로 듣는다. 그럴 때 가능하면 사전을 통째로 외우는 머리 좋은 바보들처럼, 제일 왼쪽의 첫 번째 L.P.부터 듣기로 결심했지만 그것은 그리 쉽지 않다. (실제로 내가 다니던 강릉고등학교에는 원소주기율표를 통째로 외우던가, 사전을 A서부터 외우며 한 장씩 뜯어서 삼켜버리는 천재적 바보들이 즐비했다.)

중, 고등학교 시절에 들었던 익숙한 레이블이 눈에 띌 때마다, 낯선 가수의 얼굴이 프린트 되어있는 L.P.는 언제나 뒤로, 더 구석진 곳으로 밀려나곤 했다. 연휴인 오늘도 다시 한 번 꽂혀있는 순서대로 듣기로 결심하고, 턴테이블 암의 무게를 조절한 뒤 L.P. 장 앞에 섰다. 지난번에 어디까지 들었더라.

나는 다음에 들을 L.P. 가 폴 모리아 인 것을 확인하고 그만 외면해 버렸다. 호세 펠리치아노를 들으며, 나는 나의 가벼움에 그만 한숨을 쉬고 말았다. 결국 내 음악적인 편식은 오래된 지병처럼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실은 이번 추석 연휴동안 나는 귀뚜라미와 풀벌레 소리만 가득한 산 속에 틀어박혀, 콩나물국과 김치, 계란 프라이만 먹으며 꼼짝도 않고 책과 L.P.만의 시간을 보내려 했다. 글 같은 것은 한자도 쓰지 않고 말이다. 하지만 또 이렇게 내 앞발은 저절로 움직이고 있다.)

Nicola Di Bari? 안경을 쓴 중년의 아저씨가 1975년 음반계의 유행대로 L.P. 레이블에 커다랗고 조악한 컬러사진으로 출력되어 슬그머니 미소를 짓고 있다. Pass 할까? 그러기엔 어쩐지 익숙했고 뭔가 보물을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Side 1에 수록된 Il Cuore E' Uno Zingaro(마음은 집시) 가 오래된 레코드 특유의 지글거리는 잡음과 함께 들려나오자, 나는 숨을 멈추고 말았다. 나는 급조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의 조우를 대비해야 한다. 가능하면 일상을 흔드는 충격을 받지 않도록, 추락대비자세로 말이지.

우리 대학가서 다시 만나. 내가 당신을 일초라도 흔들리게 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좋은 여자가 아닐지도 몰라. 당신이 너무 걱정스러워.

그렇게 조금씩 멀어져 가며 나를 파괴시킬 거라면, 이번에 아주 단단하게 결심 해버리라구. 나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야. 나는 언젠가는 진실이라는 것을 지닌 여자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나 그건 바보 같은 신앙이었지. 여자들은 사랑을 가슴에 지니고 태어나지. 그러나 사랑과 진실은 세상과 화학반응을 일으키면서 결국 현실로 경화(硬化) 돼. 독한 술을 지나치게 많이 분해한 낡은 간처럼. 고마워. 당신은 그런 내 믿음을 다시 한 번 확인 시켜주었어.

사랑해요. 당신을 만나게 되려고 나는 태어났나 봐요. 하루 종일 온통 당신 생각뿐이에요. 나 스스로도 얼마나 놀라고 있는지 몰라요. 영원히 당신 곁에서 당신을 조르고 귀찮게 하면서 머물래요. 라는 식의 연애편지는, 틀림없이 차가운 이별 선언으로 끝나지. 그리곤 영원한 침묵. 머지않아 그런 애증에 얽힌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실제로 내게 일어났었나? 조차도 미심쩍어지지. 그 따위 짓을 또 해야만 해?

왜 당신은 그토록 변하지 않지요?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위해 뭔가를 해야만 할 것 아니에요? 당신을 저주해요. 당신 바보에요?

그래. 당신이 아는 만큼 나도 대략은 눈치 채고 있어. 당신은 내가 유랑하는 집시인 것을 사랑하지. 하지만 나의 방랑은 사랑할 수 있어도, 나의 가난은 사랑하지 못해. 그래서 나는 다시 정착할 준비를 해야만 하고, 그때 당신이 사랑하던 집시는 차가운 회색거리의 세일즈맨이 되고 말아. 나는 머뭇거리면서 스스로 실종 되고 말지.

알아? 당신이 집시를 사랑하면 그 순간 집시는 사라진다고. 당신은 찬란한 미래를 예약한 부유한 집시의 가능성을 지닌 나를 사랑해. 그러나 그런 나는 없어. 결국 환상일 뿐이지. 나는 당신의 환상에 희생되고 싶진 않아.

이윽고 나는 이명(耳鳴)을 털어내려 가볍게 고개를 젓는다. 눈앞의 숲은, 가을이 커피 향처럼 나무그늘 사이에 배어있다. 매년 돌아오는 가을을 따라 깊어지기만 하는 고독은, 나를 안타깝게 하고 또 편안하게도 한다.

수많은 기억들과 날카로운 음성들이 머릿속에 머무는 동안, 자동 귀환 장치가 없는 수동식 턴테이블은 La prima cosa bella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지글거리고 있다. 창밖엔 낙엽이 마른 바람을 타고 맴돌며 떨어진다. 창안에 멈추어 서있는 나도, 몇 년째 더 이상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깊은 숲에서 맴돌고 있다. 유랑하는 집시답지 않게 말이지.

Che colpa ne ho
나한테 무슨 잘못이 있나요
Se il cuore e uno zingaro e va,
마음이 떠도는 집시라면
Catene non ha
얽매려 하지 말아 주세요
Il cuore e uno zingaro e va, e va
마음은 떠도는 집시랍니다.

- Il Cuore E' Uno Zingaro(마음은 집시) 중(中)에서 -


자작나무 껍질에 새기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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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2

가람가솔님의 댓글

안타깝고도 편안한 고독이라...
언제쯤 느껴볼 수 있을까나...^^;;

여백님의 댓글

집시 집시 집시여인~~
외로운 방랑을 하눈....

^,.^"
노래도 있다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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