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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과 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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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과 소주.

연필을 깎았다. Black Wood? 새벽 2시 30분의 고양이 같이 까만 놈이다. 조그만 연필깎이. 시계 방향으로 손잡이를 돌릴 때마다 나무 향기가 퐁퐁 솟아 오른다. 나무 세포 안에 숨기고 있던 향 주머니가 톡톡 터지는 걸까? 어쩌면 글씨도 잘 못쓰는 주제에 늘 연필을 쓰는 것은, 이 향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 동안 이런 연필로 사랑이 어쩌니 저쩌니 참 많이도 끄적거린 것 같다. 사랑? 응, 사랑...

우연히 누군가를 만났는데, 이상하게 밥도 먹을 수 없고, 만나기만 하면 점점 헤어지기가 싫어지고, 그 사람이 웃는 모습. 그 사람이 하는 사소한 행동들이 하루종일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니 그런 필연이 있을 수 없다.

비슷한 생일, 비슷한 취미, 비슷한 동네, 같은 카페의 손님... 수 많은 중요한 전조들이 복선으로 깔려있다. 우와! 어떻게 이렇게 유니크할 수 있을까? 우리는 만날 수 밖에 없는 인연이었군. (물론 이런 모든 중요한 전조들은, 이별 후에 전혀 연관이 없는 일들로 밝혀진다. 7마리 용꿈을 꾸고, 7번 버스를 타고, 7번의 신호를 받으며 경마장에 가서, 7번에 올인했더니, 그 말이 결국 7등으로 들어온 것과 같이.)

그러므로 '이 사람하고 같이 살고 싶다. 이 사람의 하루하루. 이 사람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인물로 끼어들고 싶다. 즐거워 하는 모습, 슬퍼하는 모습, 나이들어 가는 모습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고 싶다.' 고 하루종일 몇 번이나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게 된다. 

함께 살고 싶다는, 꼭 그러고 싶다는 신호가 24시간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을 때. 그 신호가 하루 이틀이 아니고 한 달 두달 그 이상 언제까지고 계속 될 때. 그때가 사고칠 때가 아닐까? 그러니 사랑은 절대로 철학이나 이상, 또는 환상도 아닌 것 이다. 냉정한 판단이 아닌,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운명의 이끌림. 머리가 아닌 온 몸의 신호, 절실한 가슴의 명령. 차라리 그게 맞는 것 같다. 유치하지? 맞다. 그게 전부다. 2세를 낳는 것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의 주된 임무인 것처럼.

만약 사랑이란 것이, 그 이상으로 고귀한 의미를 지닌다면 그 사랑은 이미 깨진 사랑이다. 그런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안타까움들이 모여 시가 되고, 문학이 되고, 숨을 멎게 만드는 애절한 선율이 되고, 공감하는 예술이 된다. 우리는 그 우울과 아쉬움에 공감할 수 있다. 달콤한 슬픔. 미소짓게 하는 오열.

반대로 제대로 된 사랑은, 유효기간이 명확한 쾌락과 지루한 일상이 되고 때로 일생 동안 따라다니는 천식 같은 저주가 된다. 그래서 공주와 왕자님은 언제까지고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뭐가 더 궁금해? 그게 끝이라니까? 뭐 더 듣고 싶어? 이런 젠장. 그래서 공주님은 애들 둘이나 낳고 뱃살이 푸짐하게 늘어졌고, 왕자님은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상대는 사업상 자주가던 룸살롱의... 이혼 법정에서는... 더 들어야만 되겠어?

만약 정말로 타고난 행운을 지닌 사람이거나, 진짜 철 없고 눈치 없는 사람이라면, 이 두가지를 다 피해갈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주문을 중얼거리게 된다.

"다음에 다시 태어나도 난 당신의 소유야."

로망을 믿어보자. 무지개 다리는 있다. 내가 믿는데, 당신이 못믿을 이유 같은 것은 없다.

사랑이 현실의 희망사항 이상으로 승화되는 때는, 바로 그런 현실의 가능성이 온갖 추상적인 개념으로 0에 수렴하기 시작할 때다. 인간은 고통 뿐만아니라 행복도 참아내는 이 행성의 유일한 존재다. 만약 인간이 사랑을 참게 되면, 그 모든 안타까운 순간은 흑백사진으로 얼어 붙은채, 을씨년스런 기억의 회랑에 전시된다. 대개의 인간은 그런 기억과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회랑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언젠간 깨닫게 된다.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얼마나 가슴저린 순간을 맞게 되었는지. 빗나간 큐핏의 화살 때문에 얼마나 멀고 먼 길을 돌아서 와야 했던가? 우리가 여전히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것은, 바로 사랑을 믿지 못했던 참담한 기억 때문이다. 게다가 그 기억이라는 것이 대개는 일생을 함께 한다. 맙소사. 일생 동안이라니...

함부로 사랑에 빠지는 것은 젊음의 특권이겠지만, 나는 그래서 만남도 이별도 100배는 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얼마나 괴로우려고 저러지? 가끔은 바라보기에도 조마조마하다. 무슨 참견이야? 나도 잘 못하는 주제에. 문득 나도 모르게 그 흑백의 화랑 속을 천천히 걷고 있음을 느낀다.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우울한 미소. 그렇겠지.

밤은 대책 없이 깊어가고, 돌처럼 얼어 붙은 소주를 한잔씩 녹여 가며 마시고 있다. 이런건 여러모로 쓸모 있다. 저절로 간격조절이 되기 때문이다. 취기 보다는 생각이 필요할 때 최고다. Eric Clapton의 목탄화 같은 연주로 Danny Boy 를 듣고 있다. 나는 빵조각처럼, 오래전 내가 만들었던 탄화 된 기억을 조금씩 지워갈 뿐이다.

이제 나는 소주를 마시며 연필을 깎는다. 조그만 연필 깎이에서는 여전히 나무 향이 퐁퐁 솟아 오른다. 오늘은 이별 따위에 관한 글은 단 한줄도 쓰지 않을 것이다. 일출봉 아래의 해안에서는, 아직도 파도가 구멍이 숭숭 뚫린 바위를 씻고 있겠지.

행복할까? 행복하겠지. 누구든 살아남은 사람은 모두 행복해야만 하니까.


자작나무 껍질에 새기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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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10

한승훈님의 댓글

선생님 글을 읽고 과연 나도 진정한 사랑을 놓친적이 있나 하고 곰곰히 생각해봤습니다...결론은 너무 어린시절에 느꼈던 것들이 과연 진지한 사랑이였나 하고 나름 마음을 달래봅니다.
어쩌면 그때 때묻지 않은 순수한 사랑이 진실이었을수도 있지요..

누가 말했듯이 고속도로로 가든 험란한 시골길로 가든 도착지가 똑같다면 그 인생은 성공한 길이라고..

연필을 수동으로 깍든지 자동으로 깍든지..연필에서 내뿜는 향과 글체는 언제나 똑같은것 처럼 비록 내가 선택한 길이 돌아가는길이 였다하더라고 내가 원하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달할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후회는 없겠지요..^^

김명기님의 댓글

그 진실한 사랑을 우리는 제대로 지켜 나갈 힘이 없어던 것이겠지요. 어렸고 운명은 자꾸만 폭풍으로 다가오고, 단단한 확신은  비 맞은 크래커가 되어가고... 그래요. 삶에서 성공학 위하여 그 험한 길을 돌아 온것이라고 믿기로 하지요. 그게 정신 건강에 더 나을 것 같습니다.  ^~^

sunnyday님의 댓글

우연의 일치인가요? 저도 오늘 연필을 깎았습니다. 어제 피자 시켜먹을 때 선물로 따라온 연필이었습니다. 한동안 잊고 있다가 갑자기, 지나간 사랑에 대한  생각이 무기력과 함께 밀려와서 무슨 궁리를 해야했습니다. 그럴때면 부쩍, 행복에 대한 심리학 책을 많이 읽고, 집에 와서도 수학문제를 풀고 그리고 다른 몰두할 거리를 찾는데도 자꾸만 제 자신이 바보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이란 것은 얼마나 멀쩡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버리는지... 아무래도 저도  슬로우 핸드의 " Danny Boy"를 꺼내서 들어야겠습니다.

김명기님의 댓글

Danny boy 멋지죠? 100인 100색, 연주하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의 음악이 되는 것 같습니다. 요새 피자집에서 연필도 주나요? 그거 멋지네요. 저는 일년에 한 번이나 피자를 먹을까? 쉽지 않지요. 한동안  <=== 이라시면 요즘은 싱글? 남자분들은 관심을 좀 가져 주시죠! ^~^

원샷원킬님의 댓글

연필 쓸 일이 없었드랬는데 요즘은 아이들 쓰는 연필을 깎아줍니다.

생각해 보니 어렸을 적에도 검정색 껍데기가 달린 도루코 칼로

연필을 깎아 쓰던 생각이 납니다...작은 것은 볼펜 껍데기에 끼워 쓰기도 하고말이죠...ㅎㅎㅎㅎ

사각 사각 깎이는 나무의 느낌이 너무 좋습니다.....^,.^

kirara님의 댓글

요즘 너무도 주변에서 결혼결혼 하는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정말로 이사람과 함께있고 싶고... 그사람의 나이들어가는 모습까지도 모두 놓치고 싶지 않을때 결혼이라는것을 하는것이라 생각하는데...
주변에 의해 떠밀려 지는 느낌... 괜히 고집스레이 다그치는 엄마앞에 입을 앙다물고 양볼이 부어올라 두눈엔 눈물 그득하니 버티고 있는 세살 꼬마처럼...
갑자기 문득 그런생각이 드네요...
결혼도 하기전에 결혼이란 틀에 질려버리는듯한.
조금 빠르고 조금 늦는게 무엇이 그리도 대단한 일인건지... 아무에게나 걸어버릴 인생은 아닌것인데...
누군가의 따뜻한 음성으로 듣고싶습니다.
지금 너는 잘하고있다고...

김명기님의 댓글

깎이는 느낌과 향기... 둘 다 너무 좋지요. ^~^

김명기님의 댓글

결혼은 목표가 아니라 일종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로 끝도 아니지요. 살아가면서 있을 수 있는 기쁜 일중의 하나... 그정도가 아닐까요? 신중하다면 더 좋은 것이겠지요. 끝까지 잘 유지하기 위하여 말이지요.
지금 이미 사려깊게 잘 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뭘~ ^~^

kirara님의 댓글

원샷원킬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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