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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맥 칼럼] 내겐 겨울 추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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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야금야금 부드러운 속만 파먹은 식빵 테두리처럼 남았다. 11월. 지구는 가을보다 겨울 쪽으로 기울었다. 승마교육을 시작하면서 벌써 15번의 겨울을 그 중심에 버티고 서서 맞았다. 따스한 방이나 장작난로가 지펴진 거실이 아니라 찬바람 불고 흰 눈 펑펑 쏟아지는 운동장에서 겨울을 맞고 있다.

나 자신, 한편 씩씩하기도 하고 한편 가엾기도 하다. 내 나이를 생각하면 여간 수고가 아니다. 물론 남들은 느끼지 못할 겨울의 정수(精髓)에 흠뻑 젖어들곤 했다. 여기는 대한민국이지만 시베리아나 카자흐스탄에서처럼 나는 털이 잔뜩 자란 말을 타고 겨울을 관통한 것이다. 그래서 겨울 영상이나 겨울 사진들은 내게 완전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시각적ㆍ청각적인 것 외에 경험의 겨울이 내 몸에 쌓인 것이다.

흰 눈 내릴 때 말들은 흑백 사진 속의 정물이다. 소리 없이 내리는 함박눈 속 흐릿한 형체를 지닌 배경이 되는 것이다. 하루 종일 눈이 내릴 때, 세상은 고요에 고요가 더해진다. 눈송이는 소리를 품은 채, 소리 없이 땅에 쌓인다. 가끔 말들이 내뿜는 긴 콧김이, 무성영화 속 증기기관차를 연상시킨다. ‘말이 있는 풍경’이라는 겨울 동화는 콧김으로 살아있는 영상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 흑백의 겨울 풍경화 속 두 대의 첼로 연주를 들은 적이 있다. 말들과 나만 청중인 한겨울의 산속. 그 우물같이 깊은 자작나무 숲 속에서, 두 대의 첼로 연주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었다. 눈은 첼로 위에 쌓이며 첼로 소리를 품었다. 우리는 글라스 스노우볼(Glass Snow Ball) 속의 겨울풍경이 되어 진공의 첼로 연주를 들었다.

나와 함께, 소주 두어 잔에 취한 두 첼로 연주자들. 하염없이 쏟아지는 함박눈, 오두막 노란 백열등에 비친 자작나무 숲의 공터. 콧김을 뿜으며 눈밭에 선 거대한 말들. 나를 바라보는 진돗개 복실이. 현실은 입자가 거친 흑백 사진이었다. 그날 눈은 밤새도록 내렸다.

우리는 가난했다. 그때는 겨울 낙엽처럼, 매일 부스러지는 일상을 보고 있었다. 희망이라는 것은 지난 세기의 전설이었다. ‘희망? 그런 게 어디 있어?’ 망해버린 사업가, 상처받은 음악가들, 상처받은 무명작가들, 상처받은 젊은이들과 소주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때의 절망은, 지금 돌아보니 검은 연못 위에 뜬 빨강 단풍잎처럼 뚜렷하게 아름다운 순간이었던 것이다. 내 삶에 언제 또 그리 완벽한 나만의 연주회를 맞을 수 있겠는가? 실은 내 생애 최고의 순간 중 하나였다.

이제 다가올 혹독한 겨울이 두렵지 않고 기다려지기까지 하는 것은, 내게 그 겨울의 시간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내겐 겨울 기억들이 내재되어 있다. 그 차가운 기억들은 곧잘 무쇠난로보다도 뜨거운 추억들이 되어 마침내 매서운 겨울을 견디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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