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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마(萬里馬) 비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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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마(萬里馬) 비월이.

햇살이 참 좋은 하루였다.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로 지나며 새로 돋은 이파리를 흔든다. 나는 벤치에 누워 허리를 편다. 등뼈 펴지는 소리가 내장을 통해 내 귀에 들린다. 그 소리는 나도 모르게 편안한 신음이 되어 입으로 빠져나간다. 지구가 돈다. 나는 손을 뻗어 토끼 모양으로 달아나는 구름을 잡아 본다. 손가락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이런 느낌, 초등학교 때 혼자 운동장 한 구석 시소에 누워 느끼던 바로 그 유년의 추억이다.

‘飛越(비월)’이라는 말이 있었다. 가까운 아우가 기르던 말을 내가 분양 받았다. 까칠한 성격의 암말이었다. 호리호리한 몸매와는 달리 불같은 성격이었다. 비월이는 곤지암 진우저수지 앞 콘크리트 토끼 굴에서 순치했다. 도무지 순치가 되지 않아 말을 타고 토끼 굴로 들어가 폐쇄된 공간의 시끄러운 말발굽 소리를 이용해 나를 따르게 만들었다. 처음엔 나를 콘크리트 벽에 밀어대며 반항했지만 이내 고집을 꺾고 순치 되었다.

비월이는 나와 함께 세 번의 기마국토대장정을 했다. 첫 번째, 목포를 거쳐 제주도 오라지구로 향했던 대장정중 그녀는 차령산맥 꼭대기에서 아우를 낙마시켰다. 아우는 손가락을 심하게 삐었다. 4~5명의 기승인원으로 치뤘던 첫 번째 기마대장정엔 예비 기수조차 없었다.

나는 돌쇠라는 말을 타고 비월이의 고삐를 잡은 채 약 18Km를 달려 충청도 장원마을까지 달렸다. 마치 고속도로처럼 곧게 뻗은 길을, 혼자서 두 마리 말을 타고, 끌며 구보로 달렸다. 한밤중의 도로는 공허했고 말발굽소리는 요란했다. 장원마을에서 우리는 수상한 패거리로 경찰의 검문을 받았고, 칼국수를 대접받았고, 마을 아이들에게 승마체험을 해주었다.

대장정을 마치고 몇 개월 뒤, 돌쇠는 경기도 퇴촌근방에서 산통으로 죽었다. 나와 암말 비월이, 복실이라는 진돗개, 이렇게 셋이 살았다. 자전거를 타고 마을 어귀 해장국집에서 막걸리에 얼큰하게 취해 달빛을 이고 돌아올 때, 비월이는 작은 방목장에서 이리저리 뛰어 나를 반겼다. 말 주제에, 강아지처럼 길길이 뛰며 나와 복실이를 반겨 주었다. 비월이가 어둠 속 질주하는 광경은 정말 멋진 그림이었다. 나는 그 그림을 아직 마음속에 두고 있다.

몇 해가 흘러 나는 곤지암 부근에서 목장을 하게 되었다. ‘새마’라는 거세마를 가져왔다. 그러자 비월이는 내가 방목장으로 갈 때마다 슬그머니 새마 뒤로 숨었다. 새마는 내 눈치를 보며 곤란해 했다. 마치 암말을 지켜야 하긴 하지만, 주인인 나를 노골적으로 적대시 할 수는 없다는 듯이. 나는 어이없어 콧방귀를 뀌었다. 마치 비월이는, 새 애인이 나타나면 전 애인을 귀찮아하는 여인네처럼 굴었다. ‘비월이 너를 좋아하긴 하지만, 이건 좀 아니라구. 하여간 여자들이란!’

비월이는 3번 기마국토대장정에 참여했다. 공식적인 종주기록만 1,500Km. 훈련까지 합치면 약 4,000Km의 도로를 달린 말이다. 4Km가 10리이니 비월이는 만리마(萬里馬)였다. 이 정도면 가히 전설이라고 할 만 할 것이다. 대한민국에 어떤 말도 이렇게 국토를 만리(萬里) 씩이나 달린 말은 없다. 비월이는 늘 앞장서서 씩씩하게 달렸다. 어떤 해에는 경마장에서 곧바로 나온 초짜 말이 대장정에 참여한 적도 있었지만, 비월이를 따라 아무 사고 없이 잘 달려 주었다.

어느 봄날, 나는 비월이를 타고 진우저수지의 둑으로 외승을 나갔다. 비월이가 풀을 뜯도록 풀어주고, 나는 저수지 둑 위에 허리를 펴고 누웠다. 지구가 돌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토끼 모양으로 달아나는 구름을 잡아 보았다. 손가락 사이로 봄바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갑자기 눈 앞에 함박눈이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깜짝 놀라 둑 위에 앉았다. 저수지 둑 바로 아래의 아카시아 나무에서, 꽃이 바람에 날려 둑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비월이는 폭설처럼 스치는 아카시아 꽃 잎 사이에 서서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2005년 쯤 비월이는 산통으로 죽었다. 수의사가 달려 왔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나는 비월이의 산통이 나아지기를 기다리며 함께 8시간 정도를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비월이의 마지막을 함께 했다. 봄이다. 매년 봄이면 나는 아카시아 꽃 속에 서 있던 비월이를 떠올린다. 이젠 복실이도 없다. 어쩌면 그 시절은 가장 고독하고 빈한한 시절이었지만, 내게 부족함 없는 가장 풍요로운 추억을 심어준 시기이기도 하다. 우리 삶의 다른 모든 아이러니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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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3

김영권님의 댓글

만리마 비월이는 멋진 말이였군요,
말도 사람도 사진도 정말 좋습니다.

피구왕제임스님의 댓글

_mk_긴 시간은 아닐지라도 비월이는 정말 좋은 동반자였던것 같아요!

좀비님의 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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