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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공감

뤼팽을 위한 복수

2013.04.18 22:32 1,091 46 0 0

본문

4월 초에 고려대학교 일원에 긴급조치 7호가 내려졌고
한 달 후인 5월 초부터는 대망의 완결판인 '긴급조치 9호'가 시행되면서
본격적인 '긴조시대'의 막이 올랐던 어느 해 여름에 있었던 일입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강원도에 사는 큰댁에 놀러갔습니다.
애초에는 일주일 예정이었지만 결국엔 한달 내내 거기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큰아버지, 큰어머니가 우리 아버지, 어머니보다 훨씬 더 잘 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밥도 무지 맛있었고 용돈도 무척 많이 쥐어주셨습니다.
생전 방학숙제 하라는 잔소리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여기서 계속 살아도 된다며 큰어머니는 은근한 권유도 서슴지 않으셨습니다.

큰댁에선 칠순의 조부를 모시고 두살 위의 형과 함께 사랑채에서 지냈습니다.
할머니는 서울 막내딸 집에 산관하러 가신 지 삼 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고 계셨습니다.
남편 수발이 귀찮아서 안 내려오는 것이라는 자손들의 이구동성이 무르익을 무렵이었습니다.
혹자는 옛날 소싯적에  두 차례나 첩실을 들였던 일에 대한 뒤늦은 복수라고 수군거렸습니다.

할아버지는 청년시절부터 워낙 뛰어난 섭생술을 몸에 익혀서 그랬는지,
세상에 좋다는 보약이란 보약은 죄다 쟁여놓고 장복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칠순을 훌쩍 넘긴 나이를 감안하자면 외관상 무척 젊고 건강해 보였는데도
늘상 심한 어지럼증에 몸을 가누기 어렵다며 채플린이 갖고 다니는 것과 흡사한 지팡이를 짚고 다녔습니다.
할머니께 듣기로는 '50년대 후반부터 지팡이를 사용하셨다니 대략 오십대 후반부터였을 겁니다.
지팡이에 의지한 세월도 어언 이십 년 가까이 되었으니 누가 봐도 몸의 일부처럼 자연스러웠습니다.

또한 조부께서는, 특히 밤중에, 전등 불빛을 못 견뎌하는 증세를 갖고 계셨습니다.
원래 그 시절의 노인들 중에는, 꼭 전기요금이 아까워서 그런 것만은 아니고,
옛날 기름 등잔이나 호롱불, 남폿불에 비해 지나치게 밝은 백열등이나 형광등 불빛을 대할 때면
심한 눈부심을 호소하는 경우도 꽤 많았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특히 형광등 불빛 아래에선 눈부심에 더해 어지럼증도 한층 심해진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이런 이유로 큰집의 사랑채는 날만 저물면 마치 빈집처럼 조명을 꺼놓는 일이 잦았습니다.

하지만 형의 의견을 들어보면 전혀 달랐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십수 년을 할아버지와 한 방에서 지내오던 형이 강경한 어조로 말하기를,
어지럽다고 지팡이를 짚고 다닐 정도는 분명히 아닐 뿐더러
가끔은 놀라운 속도와 유연성을 발휘하면서 운신하거나 먼 거리를 비호처럼 뛰어다니기도 한다면서
지팡이는 눈가림용 위장술일 뿐이니 언제나 그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잊을 만하면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친형제지간이었지만 종가인 큰집에 양자로 들어간 두 살 위의 형은 책을 모으고 읽는 것이 취미였습니다.
여덟 살 되던 해에 조부모를 따라 큰댁으로 옮겨가 살던 무렵부터 줄곧 이어진 일이었습니다.
초등학생 시절엔 소년 잡지 모으는 일에 온갖 정성을 쏟았습니다.
'어깨동무', '소년중앙', '새소년' 중에서 매달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은 반드시 구입했다고 합니다.
국민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부록인 연재만화까지 더해 보면, 물경 수백여 권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불행하게도 형은 새로 아버지 어머니가 된 백부 백모에게 살가운 정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큰댁 부모님들께서 형을 품어안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태어나자마자 친부모의 손을 떠나 조부모와 함께 살았던 형은
백부 백모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가슴을 열어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큰어머니 큰아버지의 간절한 노력도 세월과 함께 점점 흐트러지게 되었고
함께 산 지 칠 년이나 지났다지만 그분들을 데면스레 여기는 형의 태도 또한 한결같았습니다.

형은 집에 있는 날이면 혼자 사랑채에 들어앉아 늘 책을 읽었습니다.
푼돈이 생길 때마다 평소에 눈여겨 두었던 책을 차근차근 구입해서 모았습니다.
집안의 귀한 대종손 신분이다보니 종가를 방문하는 수많은 친척들마다 형에게 용돈을 주었습니다.
큰어머니도 형이 돈을 달라고 하면 두말 없이 건네 주셨습니다.
형은 '70년대 중반 그 시절의 또래에 비해 주머니가 무척이나 넉넉한 편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긴 돈의 대부분은 책을 사고 영화 구경을 다니는 데 썼습니다.
훗날 고모의 전언에 따르면, 웬만하면 집에 머물러 있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 무렵의 형은 이미 중학생하고도 이학년이라서 어린이 잡지랑 만화는 진작에 졸업했고
서양고전 명작소설과 국내 소설이 대종을 이루던 '삼중당 문고판'을 수집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해 여름방학에 내가 큰댁을 방문해서 형의 책상을 처음 둘러보곤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불과 이 년만에 백 권도 훌쩍 넘어 보이는 문고판 서적이 삼단의 책꽂이를 가득 채웠더군요.
을유문고나 박영문고, 정음문고는 전혀 없었고 오직 삼중당 문고판 천지였습니다.
'70년대 중반에, 열다섯 소년이, 혼자 마련한 돈으로, 이 년 동안 직접 사모은 것치곤 대단한 규모였습니다.
동화책이나 소설책 읽는 일을 무척 싫어했던 제 입장에선 더더욱 낯선 풍경이기도 했습니다.

한편,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달이나 큰댁에 머물러 있으면서 날마다 집에 틀어박혀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아침만 먹고나면 행여나 놓칠세라 형을 좇아 밖에 나가 돌아다니며 놀았습니다.
옛날 강원도 감영 건물의 고풍스런 모습이 좋아서 수시로 시가지 중심부에 자리한 그곳을 찾아가 놀기도 하고
형의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근교의 강에 미역감으러 다니다가 때론 시내 곳곳을 종일토록 배회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두 주일쯤 지나자, 이젠 형의 도움 없이도 혼자 나가 놀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일찍 없어졌던 형이 저무는 해를 등지고 싱글거리면서 돌아왔습니다.
자주 다니던 시내의 큰 서점에서 하루 종일 책을 둘러보고 읽다가 날 저무는지도 몰랐다고 했습니다.
달력 종이로 깔끔하게 싸넣은 새 문고판 한 권도 들고 있었습니다.
저녁상을 물리고 사랑채로 건너오자마자 좀처럼 켜놓지 않던 천장의 형광등을 환하게 밝히더니
방바닥에 베개를 깔고 엎드려선 곧바로 사온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옆에 누워 평소처럼 희한한 망상에 잠겨 있던 내가 물었습니다.
"형, 그거 뭔 책이여? 재미있어? 나도 읽을 수 있어?"
몹시 심하게 몰입해 있던 형이 의외로 선선하게 돌아보며 상기된 얼굴로 답하기를,
"이거 추리소설인데 무지하게 재미있어. '괴도 루팡'이라고 들어봤냐?"
내가 말하기를, "홈즈가 잡으러 다닌다는 도둑놈 아녀?"
형이 돌아보며, "홈즈는 꺼주한 영국 탐정이고 루팡은 프랑스에서 훔치고 다녔지."
말을 마치자마자 금새 다시 책에 빠져드는 형을 보면서 이내 관심을 접고 재차 망상에 빠져들었습니다.

한데, 그날따라 형이 책을 읽으면서 실황 중계 비슷한 설명을 이어가지 않았겠습니까!
아마도 좀 전에 내가 보인 관심에 한껏 기꺼워져 그리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마침내 루팡이 다이아를 챙겨선 긴 탁자를 돌아가더니…
드디어 벽면 가득한 책장 뒤의 비밀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더니… 불라 불라…"

속으론 약간 귀찮았지만 형이 그럴 때마다 적절한 수준의 반응을 돌려주면서 듣던 중이었는데,
저쪽 아랫목에서 각진 목침을 베고 왼 다리를 구부려 그 무릎 위에 오른 다리를 올려 괴어놓고
눈을 감은 채 느긋하게 부채질을 하고 있던 조부께서 나직하게 이르시기를,
"이제 그만 보고 불 끄거라!" 하시면서 돌아 누우셨습니다.

촌각의 틈도 없이 형이 맞받아치기를, "아직 아홉시도 안 됐네! 아홉시까진 불 써도 된다며!"
그러자 조부께선 한 번만 더 참아준다는 느낌이 배어나는 한층 나직하고 음산한 어조로,
"핵교 시험공부할 때나 그렇지. 쓸데 없는 책이나 읽는다고 불을 써선 안 되니라!… 빨리 꺼라!"
꼭지가 살짝 돌아간 것처럼 보이는 형이 시퍼렇게 날 선 대꾸를 가열차게 날리는데,
"이게 왜 잡서야! 어딜 봐서! 누구나 알고 있는 '세계명작'인데! 알지도 못하면서…"
"사서삼경, 공자 맹자 따위보다 비료도 훨씬 많이 들어 있는 책이란 걸 왜 모르실까!
아르센 루팡이라고 알아? 공맹 이정 주자도 이 사람한테는 완전히 털릴 걸? 키히히~ "

웬일인지 예전처럼 조부의 대응이 즉각적이지 않았고 부채의 일렁임도 전혀 급박해지지 않았습니다.
숨소리조차 멈춘 듯, 한동안 기이한 정적이 흘렀지만 예견했던 일은 다행히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잠시 숨을 죽인 채 눈치를 살피던 형은 조용히 일어나 천장에서 내려비추는 형광등을 꺼버리고
윗목 구석에 있는 앉은뱅이 책상 위의 스탠드를 밝히더니 거기 앉아 조용히 책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탁상용 스탠드라고 해봐야 요즘 같은 모양은 전혀 아니었고
그러니까 그게… 굳이 형상을 묘사하자면, 막걸리 양재기 비슷한 모양을 한 갓의 옆구리에 구멍을 뚫어서
거기에 전선이 달린 소켓을 심고 삼십 촉짜리 백열등을 끼워넣은 모습이었는데
그래도 방향과 높이만 잘 조절하면 빛 차단 효과가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그러기를 삼십 분쯤 지났을 때였습니다.
공상에 잠겨있던 내가 무언가 서늘함을 느끼고 무심코 오른쪽을 돌아보는 순간이었습니다.
어둑한 아랫목에서, 일체의 소음도 없이 미세한 공기의 파동조차 완벽하게 눌러놓고
그야말로 먹이를 앞둔 표범처럼 소리없이 몸을 펼치고 일어서는 물체의 윤곽이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습니다.
뒷벽엔 어슴프레한 형상을 빼닮은 한층 거대한 그림자가 암흑의 괴수처럼 일렁거리고 있었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형체의 한쪽에서는 두 줄기의 담록색 광채가 유성처럼 번뜩였습니다.

사람 비슷한 형체가 동체를 완전히 일으키자마자 홀연히 날아오르더니 찰나에 책상 옆에 나타났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괴이한 수법으로 순식간에 책을 빼앗아 들고선 가차없이 찢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넋 놓고 책을 읽던 형은 딱히 대응할 방법조차 떠올리지 못하고 그저 입만 딱 벌린 채 굳어버렸습니다.
그야말로 일수유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뒤늦게 득달같이 튀어오른 형이 책을 빼앗으며 큰소리로 울부짖었지만
형태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여러 조각으로 갈라져 산산히 흩어진 뒤였습니다.
칠십 중반의 노인이 순식간에 책을 그토록 수월하게 찢어놓을 수 있는 악력을 지녔다는 점도 놀라웠지만
아랫목에서 삼미터도 넘는 거리를 찰나에 줄여버리는 경인할 몸놀림은 가히 소름끼칠 정도였습니다.

그날 밤, 중학교 2학년인 열다섯 살 사나이는 오랜만에 오래도록 서러운 눈물을 뿌렸습니다.
그 시절엔 투명 비닐 테이프도 구하기 힘든 시절이었고 책이 워낙 사나운 모양으로 찢어지다보니
한 조각 한 조각 모아서 다시 맞추어가던 애처로운 손길마저 얼마 지나지 못해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아랫목으로 돌아가 누운 할아버지는 변함없는 자태로 느긋하게 부채질을 하다가 곧이어 잠에 빠져 들었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멍하니 누워있던 나는 그날따라 이상한 상념에 여러 차례 자리를 뒤척여야 했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안채의 대청 마루에 모여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평소처럼 형을 따라 사랑채로 건너오지 않고
열려진 안방 문을 들어섰더니 한켠에 앉아서 쪽창을 내다보며 담배를 태우시던 큰아버지가 계시길래
한켠에 주저앉아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기척에 돌아보신 큰아버지께서는 곧바로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지폐 몇 장을 건네주며 자상하게 말씀하시기를, "오늘은 형더러 극장 구경 가자고 해봐라.
시공관에서 제임스 코번이 나오는 전쟁 영화를 시작했더라."
신속한 손놀림으로 넙죽 받아들며 "이예~" 하고 우렁차게 대답한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뜸 안방 벽장을 열어제끼곤 거기 가득 쌓여있는 사진첩을 꺼내 보기 시작했습니다.

한 장씩 넘겨가며 옛날 집안 어른들의 사진을 살펴보다 확연히 느낀 것인데,
큰댁에는 우리 집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한 옛날 사진 자료가 수집되어 있었습니다.
옛날 사진을 형제끼리 대충 나누어 가졌을 테니 양도 비슷하겠지하는 처음의 짐작과는 다르게
우리집엔 몇 장 있지도 않은 1930년대부터1950년대까지 찍어놓은 옛날 사진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맏이였던 우리 조부모와 직계 후손은 물론이고 네 분의 종조부와 역시 네 분의 종조모,
두 분의 대고모와 그 남편들인 대고모부들의 사진 뿐만 아니라
기십에 이르는 그 집안 자손들(내겐 오촌 당숙 및 당고모들)의 옛날 모습도
시기 별로 거의 빠짐없이 수집되어 있었습니다.
어쩐지… 사진첩의 권수가 유달리 많아보였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큰댁에서 수집하셨던 것은 아니고 조부모께서 물려주신 사진첩이었습니다.

사진을 정신없이 들여다보느라 출근하는 큰아버지의 기척도 알아채지 못했고  
큰어머니도 여전히 부엌에서 바쁘셨으니 결국 안방엔 덩그러니 나 혼자였습니다.
한참을 지나자 사랑채로 건너갔던 형이 뒤따르지 않는 내가 궁금했던지 다시 안채로 건너와
안방에 있는 나를 들여다보곤 이내 들어와 앉더니 함께 사진을 들춰보면서 킬킬대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옛날 사진은 혼자 보는 것보다는 함께 봐야 제맛이란 걸 새삼 느껴보는 순간이었습니다.

신림 대고모부의 빛나는 대머리는 남양군도의 땡볕에서 고생하다가 생긴 게 아니라
태생적으로 벗겨졌다는 명백한 증거는 물론이고,  
용둔에 사시던 종조모의 놀라우리만치 생쥐를 빼닮은 특이한 얼굴은 예나 지금이나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는 진실과 …
'50년대 후반에 일찌기 세상을 떠난 넷째 종조부 얼굴이 제천 당숙 아저씨랑 판박이라는 둥…
문중 재산 몰래 팔아먹기에서 절대고수였던 둘째 종조부의 젊은 시절 모습이 배우 허장강을 닮았다는 충격적인 사실과…

잠시 후, 사진첩 두 권을 다 보고 벽장에 넣어두면서 낡았지만 굉장히 두꺼운 또다른 사진첩을 집어 내렸는데,
무슨 생각 때문인지 한참을 혼자 낄낄거리면서 때론 몸서리까지 쳐대던 형이 기쁨을 감춘 은근한 목소리로,
"이 앨범은 사랑채에 가져가서 보도록 하자!" 라며 일어섰습니다.
나도 딱히 거부할 이유가 없어서 그러자고 했고 때마침 방에 들어오시는 큰어머니께,
"나중에 갔다놓을께요."라며 여쭈었더니, 웃으시며 "다른 것도 많은데, 다 봤냐?" 하시길래,
"이제 두 권 봤어요." 했더니, 형을 쳐다보시곤, "너는 수십 번도 더 봤을 텐데 또 보고 싶더냐?" 하셨습니다.
무언가에 쫓기듯 바쁘게 대청을 내려가던 형이 성의없이 대꾸하기를,
"얘한테 옛날 사진 설명을 해줘야지." 하고선 곧바로 나를 재촉했습니다.

사랑채로 건너오자마자 방바닥에 사진첩을 펼쳐 놓고 둘이 앉아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때론 내가 묻고 형이 설명하면서 한 장 한 장 넘겨가던 중에,
한 면의 상단을 가득 채울 정도로 큰 사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일본군 복장을 한 젊은 군인이 엄청 큰 호마(옛날 노인들이 서양 말을 이렇게 불렀음)에 올라타고
옆으로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는 독사진이었는데 옆구리엔 긴 왜도를 빗겨 찬 위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내가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큰아버지 같은데?"
형이 대답하길, "아버지 맞지! 옛날에 관동군에 있을 때 기병이었다더라."
곧이어 덧붙이기를, "입대한 지 몇 달 안 되었을 무렵에 갑자기 소련군이 만주로 밀고 내려와서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동해안을 따라 정신없이 쫓기며 내려오다가
결국엔 청진 근교에서 소련군에게 포위되어 항복했고 그길로 포로가 되었다고 하더라."
내가 한탄하며 이르기를, "역시… 큰아버지도 왜군 노릇을 했구나~"
형이 뒤이어 말하기를, "그래도 조선인이라 시베리아까진 끌려가지 않고 돌아온 것이 천운이라더라. "

큰아버지의 일본군 복무 시절의 사진을 몇 장 더 보다가 뒤로 넘겼더니
거기부터는 일제 시대 말기에 찍어놓은 조부의 사진이 여러 장 실려 있었습니다.
커다란 서양식 건물 앞 계단마다 도열한 수십 명의 거의 똑같은 복장을 한 사람들 중에서
형은 용케도 조부의 얼굴을 찾아내선 내게 일일히 짚어 주었습니다.
그때마다 형은 부자연스럽게 큰 목소리로 "우리 할아버지 여기 있네!" 라고 외쳤습니다.

시기만 조금씩 다를 뿐 거의 똑같은, 관리 혹은 교사 집단으로 보이는,
뻔한 복장에 뻔한 얼굴 모습을 한 사람들의 단체 사진을 몇 장 연이어 접하게 되자,
금방 심드렁해져서 재빠르게 사진첩을 넘겨가던 차에
특이한 느낌을 풍기는 한 장의 사진이 순간에 빨려오듯 내 망막을 가득 채웠습니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왜국의 하오리(羽織) 복장으로 성장을 한 여섯 명의 중년인이
장대한 서양식 건물의 현관 계단 위에 일렬로 도열해서 엄숙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사진었습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가운데 있는 놈은 카이젤 수염을 폼나게 길렀는데,
그놈을 유심히 쳐다보던 내게 옆에 있던 형이 이르기를,
"할머니한테 물었더니 이 놈이 바로 당시 우리 도에 내려와 도지사를 해먹던 왜놈이라더라."

그로부터 한 사람 건너 왼쪽에는 아주 낯익은 수려한 용모의 중년인이 역시 하오리를 걸치고 게다를 신은 채
단정한 신색으로 서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눈에 너무 익어서 확인하려고 형을 쳐다봤더니
묻기도 전에 대뜸 이르기를, "누구긴! 저기 누워계신 겁나게 위대한 우리 할아버지라네~
"어째… 왜놈식 변발까진 차마 하지 못 했던 모양일세~ 크흐흐"

숨도 쉬지 않고 연이어 목소리를 높히면서 형이 따발총처럼 내뱉는데,
"이놈 이거… 왜놈 도지사라는 놈의 면상좀 봐라.
조선 사람 피를 엔간히 빨아먹은 기색이 완연하잖냐, 이거.
그 옆에 있는 놈들이야 죄다 왜놈 밑에 붙어서 동족을 배신한 댓가로 호의호식하던 놈들일 터!"

혀끝을 영활하게 휘돌리며 입술에 침을 한 차례 바르더니 의분에 찬 목소리로 이어 말하기를,
"어떤 사람은 처자와 재산을 들어 바치면서 때론 만주 벌판을 들개처럼 떠돌면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초개처럼 목숨을 던졌다는데,
어떤 배운 놈들은 왜놈 발바닥을 핥아대며 틈만 나면 동포의 고혈을 짜먹던 극악한 놈들 아니겠냐!
이 사진 속에서 왜놈 옆에 간신처럼 붙어 있는 놈들도 따지고 보면 죄다 민족 반역자들 아니겠냐!
게다가… 복장좀 봐라, 이거… 옷차림하며 게다짝까지 챙겨 신은 꼬라지하며… 아주 열성일세~
에라이~ 쳐죽일 놈들! "

그러더니 훼까닥 고개를 돌려 아랫목에 누워계시던 조부를 샛노랗게 노려보며 외쳤습니다.
"존경해 마지않는 할베 어르신이요! 어떻게 생각해요? 에?… 에?
친일파놈들을 죄다 처단했어야 나라가 바로 서지 않았겠어?
지금이라도 나라에 상소좀 올려보지, 그래!
그 올곧기 그지 없다는 유림의 명징한 기개는 어따 쳐박아 놓은 거요, 에? 에?
이럴 때 쓰는 게 선비의 절개와 기상 아닌가? "

미동도 없이 눈을 감고 있는 할아버지 모습에 재차 분격한 형이 말하기를,
"친일파 놈들을 죄다 잡아들여 도끼로 대갈통을 갈라보는 게 내 평생 소원이라네!"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인 이유도 친일 민족 반역 분자들이 분탕질쳐서 그런 거 아니요?
할아버지! 뭐라고 말좀 해봐! 지금이라도 친일파를 잡아죽여야 돼, 말아야 돼?
… 에?… 에?"

견디다 못한 조부께서 벌떡 일어나 앉으면서 말하기를,
"이놈아! 이… 천하에 망할 놈아!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러더니 갑자기 손을 뒤로 돌려 목침을 잡아올리더니 냅다 집어던졌습니다.

총알처럼 날아오는 목침의 속도와 표적을 향한 극히 정교한 궤적에도 불구하고
진작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놓았던 형은 유연한 동작으로 목침의 궤적에서 훌쩍 벗어나더니
잽싸게 방문을 넘어가 신발을 집어들곤 곧바로 그레이하운드처럼 달려 나갔습니다.
뒤따라 대문을 나선 조부께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형을 쫓아 뛰기 시작했습니다.
역시나… 칠십 중반의 노인이라곤 짐작도 하지 못할 유연함, 속도, 지구력이었습니다.
하지만 끝내 형을 따라잡진 못했고 한참을 대문 앞에서 분을 삭히다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이윽고 방으로 돌아와 자리에 누웠습니다.

조손 둘의 하는 양을 오랜 시간 가만히 지켜보던 내가 숨이 잦아든 조부께 진중하게 물었습니다.
"듣기로는 서른 살까지 달랫강에서 경성을 오가는 무역업을 하다가 관직에 나가셨다던데요?"
눈을 감은 할아버지는 귀찮다는 듯이 짧게 답했습니다. "그랬다!"
대화는 거기서 끊어지고 사랑채는 저녁 나절까지 빈집처럼 고요했습니다.
그렇다고 그 긴 침묵이 지루하거나 불편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린 내가 견디기에도 꽤나 쫀득거리는 침묵일 뿐이었습니다.

형의 얼굴은 그날 저녁 식탁에서 볼 수 있었는데 연신 싱글벙글이었습니다.
어린 내 눈에도 어딘지 스스로를 거룩하게 여긴다고 느껴질 정도로 당당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날따라 밥도 무지 많이 먹어치우더군요.
행복해 보였습니다.








※ 주의 : 이 글을 읽고도 댓글을 남기지 않는 사람은 코털이 빨리 자라는 증세에 평생 시달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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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46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19 00:20

자정입니다.

이거 참... 별일일세~
당신이 웬일로 긴 글을 다 썼소?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19 00:20

이런 짓도 근 일 년만인데,
처음엔 한 시간이면 될 줄 알았더니
써내려가다보니 두 시간도 더 걸렸잖소!

이거... 점점... 만만치 않은데? ㅋㅋ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19 00:21

그러면 이 글을 읽고 내가 떠올리는 그것이 오늘의 대화 주제로 정해진 거요?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19 00:22

그렇지!
여기가 바로 우리 할아버지를 씹는 공간이오.

주말 내내 줄창 씹어 봅시다.  으하하~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19 00:40

조상을 씹으면 안 되는데...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19 00:40

무슨 소리!
내 조상을 먼저 씹어야 남도 씹을 수 있는 거요.
기탄 없이 임해 봅시다! 크하하~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19 00:45

본문 말미에 당신이 덧붙여 놓기를,
글을 읽고 댓글 안 남기는 사람은 콧털이 빨리 자란다며
가당찮은 겁박을 늘어놓은 이유는 뭐요?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19 00:56

겁박은 무슨!
남의 조상 이야기이다보니
읽는 분들에겐 여러모로 민감한 내용으로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고
댓글로 의견을 남기는 일조차 꺼려하는 분들도 계실 것 같아서,
바로 그런 분들을 위한 친절한 배려심을 보여준 거요. ㅋ
다시 말하지만, 기탄 없이 씹어도 괜찮다는 얘기일 뿐이라오.  ㅎㅎ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19 00:59

당신 할아버지는 언제 돌아갸셨소?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19 01:09

아흔이 다 되어 '87년 가을에 돌아가셨소.

한데 정말 신기한 일이 있었다오. 
조부께서 임종한 며칠 후에 알아챈 사실인데
알고보니 우리 조부께서 세상을 떠난 날짜와 시간이
'79년에 조모께서 돌아가신 날짜 및 시간과 정확히 겹친다는 점이오.
한 날 한 시에 죽었다는 얘기가 되는 거지.

후손들은 조부께서 의도적으로 그리 한 걸로 받아들이고 있소.

조부께선 임종하기 두 주 전부터 곡기를 끊고 가만히 누워 계셨는데
후손들의 간절한 권유에도 한사코 병원행을 거부하시다가
조모의 기일을 맞아 아침 나절에 홀연히 숨을 겨두셨소.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19 01:11

조모께서 '79년에 돌아가셨다면
조부께서 홀로 꽤 오래 사셨겠군.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19 01:18

우리 조모께서 돌아가실 무렵에도 꽤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오.
당신도 잘 기억하고 있겠지만, 1979년 10월 26일에 박통이 죽었잖소.
우리 조모의 임종일도 바로 그날이었소.
그래서 우리 조모도 국장을 치른 것처럼 장사지냈소.

한 가지 불편한 점이 있었다면,
그 무렵엔 온 시내의 상가들이 며칠 간 죄다 자발적으로 쳘시하는 바람에
장례에 소요되는 각종 물품, 예를 들어 양초 한 통 혹은 문종이 몇 장을  구하는 데도  몹시 힘들었다는 거요. ㅋㅋ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19 01:28

조부가 왜놈 밑에서 지방 관리 생활을 오래 하면서
당신네 집안의 생활은 넉넉했소?
조선 백성의 피를 많이 빨았냐 이 말이오. 크흐흐~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19 01:28

자세한 사정이야 나는 잘 모르지.

듣기로는, 위에 본문 말미에도 잠깐 나오지만,
지방 유림의 천거로 관직에 몸 담기 전에 이미 상당한 부자였다고 하더이다.
양자로 들어간 대종가의 재산도 무척 많았고
청년시절 경성을 오가는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돈을 굉장히 많이 벌었는데
전성기엔 논이 삼백 마지기도 넘었으며
비록 내륙 수운용이었다지만 배도 여러 척 가졌다고
문중의 할머니 여러분들로부터 귀가 아프도록 들은 바 있었소.

또한 그런 사정을 짐작할 만한, 내가 알아본, 한 가지 근거가 있다면,
일찌기 1910년대 초에 열세 살의 나이로 조모와 혼인하신 조부께서는
1920년 초반에는 경성에서도 경복궁 옆 계동 근방에 큰 기와집을 마련해놓고
거기에 소실을 들여 할머니 몰래 몇 년 간이나 사통했다고 하더이다.

그 시절에 지방 사람이 경성에 첩까지 두고 살았다면 부자가 틀림없지 않겠소? 크흐하하~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19 01:29

그렇다면 경성의 첩실 슬하에도 소생이 있었소?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19 01:29

다행히 없었다더군. ㅋ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19 01:31

당신이 올린 본문의 초반부에도 적혀 있지만, 
조부께서 생전에 첩실을 두 번 들였다고 했는데
첫 번째는 나왔고 두 번째는 언제였소?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19 01:46

조부께선 해방 후에도 계속 관직에 계셨는데
이승만 정권 말기엔 지방 관리로 꽤 높은 지위에 오르셨던 모양이오.
듣기로는, 육이오 동란이 끝난 직후인 '53년 혹은 '54년 무렵에 새로 소실을 두었다고 들었소.
경성에 있던 첫째 소실은 언제 정리했는지 들은 바 없소.

모친께서 이르시기를, 1960년 초봄에 시집을 오시면서
그 때까지도 조부께서 여전히 두 집 살림을 하시는 걸 목격했다고 하셨는데
몇 년 뒤에 공직에서 사퇴하시자마자 첩실 쪽을 정리했다고 들었소.
아마... 그게... 내가 태어날 무렵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오.

훗날,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는데,
하루는 모친과 함께 시내를 나가 돌아다니다가
어떤 초로의 현숙해 보이는 아주머니를 보고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시더니
갑자기 나더러 그 아주머니께 인사를 올리라고 하시더군.
모친께서는 비록 갈라섰다지만 한 때는 작은 할머니였기 때문에 인사를 시킨 것이었소.
당시 나는 멋도 모르고 그 노인네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잖소.  크흐흐~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19 01:46

어!
시간이 벌써....

내일 다시 합시다.
이만 퇴장합니다~

아범님의 댓글

오늘 아침 화장실에서 느긋하게 읽었슴돠~

형님의 정곡을 찌르는 복수군요.
왠지 할아버지께 동정심이...

允齊님의 댓글

소년 쎈자님의 유년시절 이야기....

단숨에 읽었습니다...장문의 이야기를 간만에 읽는지라 모처럼 잼나게 읽었습니다.

콧털이 길어질까봐 소심한 맘에 얼러덩 댓글답니다...

ohnglim님의 댓글

집안마다 문중재산 몰래 팔아먹는 작자들이 꼭 있구만요.
(본글과 상관없는 댓글을 ㅋㅋ)

하여튼 글에서 그림이 보이는듯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보람진 점심시간이었어요..ㅎㅎ

성진홍님의 댓글

전 이미 털이란 털은 급속 증식되는 증상을 평생 끼고 살아온 터라, 댓글을 달지 않으려 했으나,
쎈자님과의 정을 생각해서 급 댓글 답니다. ㅋㅋㅋㅋㅋㅋ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19 23:36

저도 요즘 들어 코털이 예전보다 빨리 자라더만요. ㅋ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19 23:38

갱년기 증상 중에 그런 현상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기억이 없는 거 같은데...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19 23:39

금요일 자정이 임박했습니다.
4월 중순의 여름날 저녁은 역시나 텁텁하네요~ ㅋ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19 23:48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소.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19 23:49

뭐든 물어보시오.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19 23:52

이른바 '친일파 청산'에 관한 문제 말이오.
요즘의 온라인 공간에서 여론을 살펴보면 예전보다 더 강경해진 거 같더군요.
옛날에도 그러니까 '70년대 초중반에도 친일파 청산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큰 호응을 얻고 뭐 그랬소?

달리 말하자면, 본문에서도 나온 것처럼,
당시 일개 중학생이었던 당신 형이 저런 의견을 일상 속에서 표출했다는 것은
당대의 사회 기층에서나 청소년 세대 일반에서 소위 '친일파 청산' 문제를
아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고 그 해결을 요구하는 집단 의지가 충만했었느냐는 말이오.

또 달리 말하자면, 옛날 박통의 유신시대에도 친일파 청산 문제가
공개된 주요 사회 이슈 중 하나였느냐는 질문이오.

이거... 궁금하지 않소? ㅋ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19 23:52

결론만 말하자면,
분명히 그러했소.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20 00:33

엄밀하게 말하자면, '친일세력'에 대한 '인적 청산'에 촛점이 두어졌다기보다는
포괄적으로 '일제 잔재 청산'에 관심을 두었다고 보는 게 사실에 가까울 거요.
제도, 관행, 언어, 풍속, 문화 등의 각 분야에 배어있는 잔재의 청산을
정부가 '조국 근대화'란 슬로건 아래 주도, 주창했던 시대였소.
물론 민간에서는 친일 인물에 대한 인적 청산을 촉구하는 움직임도 분명히 있었소. 

이 문제는 약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한 사안이기도 하다오.
귀찮지만 아는 한도 내에서 설명을 붙여 놓을 테니 들어 보시오.

그러니까… 그게...
'63년에 박통이 집권하자 곧바로 한일 간의 국교 정상화를 위한 정부 간의 물밑 협상이 개시되었고
얼마 후에 협상의 대강이 국민들에게 알려지자 야당과 국민의 반대 여론이 고조되다가
급기야 '64년 봄부터는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 투쟁이 벌어지지 않았겠소.
당대의 청년 학생 운동 역량도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했소.
소위 말하는 '6.3 사태'가 바로 저 시절의 대투쟁을 일컫는 말이오.
당시에 시위 투쟁이 너무 격렬해서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기도 했소.
정권 기반이 근저에서 흔들렸을 정도로 큰 위기였소.

하지만 우리 국민의 일관된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미국에 의해 내려먹여진 수정 불가능한 일정이었기 때문에
긴 우여곡절 끝에, 내 기억이 확실하진 않지만, '65년 말에 이르러 결국 협정이 체결되었고
한일 양국 간에 정식으로 국교가 수립되지 않았겠소.

여기서는 말이오.
한일 협정의 성격이나 그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는 접어두고
이 과정에서 박통 정권이 '친일 정권'으로 이미지가 고착되는 측면에만 주목하자는 얘기요.
거기에 박통의 개인 전력도 결부되고 하니까 '친일 이미지 낙인'은 국민 일반에게 굉장한 설득력이 있었잖겠소.
박통 정권의 친일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을 정도이니,
저 무렵에 찍힌 낙인이 깊긴 무지 깊었나보오. 으흐흐~

한데 말이오.
정작 흥미로운 점은 따로 있었소.

당신이 위에서 묻기를,
'70년대 중반이라면 유신체제의 기반이 절정기에 올라섰던 시기였음을 감안하자면,
과연 그 시절에 '일개 중학생이 일상적으로 입에 담을 수 있는 생각이었느냐'는 의문이기도 할 텐데,
사실… 일상적으로 입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였소.

왜 그런 줄 아시오? 크흐흐 ~

박통 시대는 말이오, 특히 박통 후기의 유신시대는 말이오.
초중등 교과 과정을 통해 역사상 유례가 드물 정도로, 그야말로 전방위적으로,
'민족주의 의식화 교육'이 극성을 부렸던 시대이기도 했다는 거요.

흔히들 그 시대엔 '반공 교육'과 '새마을 정신 교육' 혹은 '공공질서 교육'이
사회 교육과 학교 교육의 중심에 있었다고 여기기 쉬운데
사실은 그에 못지 않게 '민족주의 역사 교육'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기도 했소.

시월 유신을 전후한 시기부터 초중등학교의 역사, 윤리, 사회 교과서에서
소위 '식민사학의 잔재'를 철저하게 색출해서 도려내고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한 최신의 연구 성과'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시작했는데
그에 따라 교사들의 교수 태도나 방향도 강하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거요.

'유관순', '안창호', '신채호', '김구' 등의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민간이 아닌 정부의 시책에 의해, 학교 현장은 물론 국민 일반에 대대적으로 그 업적이 선양되고
거창한 기념일 행사나 전시회 등을 통해 숭모 의식을 본격적으로 고취하기 시작한 시대가 바로 유신시대 아니었겠소.

이런 역사적 인물을 영웅화, 더 나아가 신격화하는 관변 사업의 최정점에는 단연 '이순신'이 있었소.
새삼스럽게 생가를 대대적으로 정비해서 성역화하고
엄청난 숫자의 동상을 제작해서 전국 각지에 세웠으며
각종 매체를 통해 수많은 드라마, 영화를 제작해서 보급, 선전하는 일에도 엄청난 예산을 투입했고
나중에는 표현이 지나치다 못해 '영웅'도 아닌 '성웅'(聖雄)이라는 표현까지 만들어 사용했었소.

그 시절, 충무공 노래는 국민학생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배워 부르는 노래였잖소.
'보라,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그의 모습, 거북선 거느리고 어쩌구 저쩌구'하는 노래 말이오. ㅋㅋ

따라서 '70년대의 초중고 교사들 중에서는, 특히 사회, 역사, 국어 교사들은,
강경한 민족주의자 노릇을 하지 않은 자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당신의 옛 기억을 잘 떠올려보면 대번에 납득할 수 있을 거요.

더 중요한 점은, 우리 나라 초중등 교육의 역사에서 유신 시대의 잔재는, 사실 말하기도 가슴 아프지만,
지금까지도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하오!
 
어떻소!
항일 민족 영웅 이순신이 박통 시대에 극한의 숭배 대상이었다는 공교롭고도 희한한 사실이!
요즘까지 이어지고 있는 박통 정권의 이미지에 비하자면, 조금 색다르지 않습니까? 으하하~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20 00:36

박통 시절에 관변 단체를 통한 사회 계몽 활동이나 학교 제도 교육을 통해서
'민족주의 의식'을 적극적으로 고취시켰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오?

혹시 말이오,
'친일 반민족 정권'이란 낙인을 씻어보려는 반사적인 노력의 일환은 아니었을까?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20 00:38

훗날, 저 시대를 회고하면서 그렇게 짐작하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긴 하더이다.
역사적인 평가가 아닌, 저 시대를 겪어봤던, 내 개인의 느낌을 솔직히 말하자면,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요.
박통 본인이나 당시의 정권 핵심 인물에게 직접 듣지 못했으니... 알 길이 없지 않겠소. ㅋㅋ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20 00:41

그와 관련해서 시대를 밑으로 내려서 잠깐 살펴봅시다. 
주로 '70년대에 태어난 세대들이 중등교육 과정을 이수하던 시대인
5공의 전통이나 6공의 시작이었던 노통 시대에는 사정은 어땠소?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20 00:42

'80년대 교과서 중에서 국사, 세계사, 윤리, 정치경제 등의 사회 과목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70년대 중후반의 유신시대와 차이가 없었던 걸로 기억하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아마도… 전노 시절에 중등 교육을 받았던 세대들도 '민족 의식'이 남다를 겁니다. 으하하하~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20 00:44

한 개인이 사회 역사 의식을 형성하게 되면서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드러낸다고 해서 꼭 나쁜 건 아니잖소?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20 00:50

진실과 자유와 정의 앞에서 굽힐 줄 아는 '민족 의식'이라면 나쁠 게 뭐 있겠소!
허상과 탐욕에 기반하고 있는 '민족 의식'이라면 하루 빨리 박멸해야겠지만 말이오.
박통 시절에 중등교육 제도를 통해 집중적으로 전파되고 수용을 강요당했던 '민족 의식'의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야말로 집단 허위 의식의 일대 총화總和에 다름 아니었다고 여기고 있소.

그 시대가 남긴 후유증은 이런 면에서도 굉장히 심각하다오.
요즘도 주변을 둘러 보면,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주의를 옹호하며
사회의 개혁을 열망하고 더 나아가 진보적인 성향을 가졌다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서,
유신 시대에 싹을 틔우고 전통, 노통 시대에 더욱 공고해진 '민족주의적인 역사 인식'의 수렁에
발목이 붙들려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수두룩하다는 엄중한 현실을 직면할 때면... 암담하기 그지 없소.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20 00:52

어!
이건 당신 얘기를 듣다가 갑자기 생각난 것인데,
그게 재작년 봄인가 그 무렵에, 
당신이 황기호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옛날 군대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을 때,
그와 목소리가 비슷하다면서 신용하 선생을 언급한 적이 있었잖소?

그때 홍똘님도 댓글을 달았는데, 신용하 선생이 동향이라면서도 어딘지 시큰둥해 하셨던 일도 있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오늘 떠들었던 내용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소?
따지고 보면, 신용하 선생이야말로 유신시대의 사회 여건이나 당시 정부 시책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편승해서 이름을 얻게 된 대표적인 학자라고 볼 수 있으니 말이오.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20 00:53

그러하오.
당시 홍똘님의 시큰둥한 반응도 아마 비슷한 이유 때문이었을 거요. 크하하하~

쿠아앙~잉?님의 댓글

이분들은 왜 말투가...;;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22 17:15

웬일로 유부방에선 낯선 분이 댓글을 올리셨군요~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22 17:15

뉴스 게시판 쪽에선 가끔 보던 이름입니다.
혈기왕성하시더만요~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22 17:16

우리 말투가 왜 그러냐고 물으시는데?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22 17:16

뒷말을 생략하셔서 정확히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지 약간 궁금하긴 하네요~ ㅋ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22 17:17

우리 말투가 이 모양인 이유를 당신이 설명해 보시오.

향기님의 댓글

향기 125.♡.174.103 2013.04.22 17:19

글쎄...
호리건곤 임보산의 말투를 흉내내는 중이라고 하면
손님께서 이해하실 수 있을라나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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